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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 금학도
중고도서

벽오 금학도

: 이외수 장편소설

이외수 | 해냄 | 2008년 06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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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21쪽 | 49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3379828
ISBN10 8973379828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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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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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구슬리듯 대학생을 재촉하고 있었다.
“편재(遍在)라는 것이 되는 마을입니다.”
대학생이 가까스로 입을 열고 있었다.
“편재라니.”
“사전적으로는 두루 퍼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학동에서는 좀 다른 의미로 쓰여집니다. 저 자신이 모든 사물과 두루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가 모래알이 될 수도 있고 물방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될 수도 있고 민들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태양이 될 수도 있고 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가 직유(直喩)의 마을이라면 거기는 은유(隱喩)의 마을이죠.”--- p.13

아이가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는 자기 집 마당 가운데 서 있었다. 백주에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물에 빠져 죽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라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둘러싸고 쉴새없이 질문의 소나기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햇빛이 우라지게 좋은 봄날이었다. 무너진 토담 너머로 진달래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저 애는 귀신이 아닐세. 그림자를 보게. 귀신은 영체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법이지. 뿐만 아니라 귀신은 절대로 햇빛 속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네. 저 애는 귀신이 아닐세. 집문서를 걸고 내기를 하자고 해도 자신이 있네.”
“그런데 머리카락이 왜 저렇게 세어버렸는지 누가 한번 물어보게.”
“물어본다고 어디 속 시원히 대답이나 해주던가. 원체 생각이 깊고 말수가 적은 애라 도대체 심중에 뭐가 들어앉아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마을 사람들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아이는 홍원댁의 말대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이나 까만 머리카락은 단 한 올도 눈에 띄지 않았다. --- pp.27~28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는 마치 모태 속에 들어앉아 있을 때처럼 평화롭고 온화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이 본래의 상태였다. 지금까지 오랜 잠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기억이 선명치는 않았지만 몹시 어수선한 꿈을 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 꿈의 여운처럼 잠시 아이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사라져 갔다. 어디선가 푸득푸득 새의 날개짓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귀에 익은 소리 같았다. 눈을 뜨니 하늘이 보였다. 눈부신 구름들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금빛 날개를 가진 새들이 아이의 주위를 호위하듯 선회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새들이었다. --- p.111

오학동을 다녀온 이후로 그는 가급적이면 모든 사물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보이는 모든 것을 아름다워하려고 노력했고 들리는 모든 것을 아름다워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너 하나의 마음이 탁해지면 온 우주가 탁해지는 법이니라.”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그는 마음을 탁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날마다 명상을 계속해 왔으며 여러 가지 경전들을 통해 우주의 근본에 도달해 보려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제 최소한 분별심 정도에서는 헤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옳고 그름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많고 적음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있다 없다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이 세상 만물이 썩지 않으면 무엇이 거름이 되어 창조의 숲을 키우리. 비록 세상이 온통 썩어 문드러졌다 하더라도 이제 그에게는 그것조차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눈물겹게만 생각되었다. --- pp.295~296

“이제야 저 그림을 찢을 수 있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윽고 강은백이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호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달빛 한 조각이 잘라져 반짝 섬광을 발하는 것이 보였다. 강은백은 무릎을 꿇더니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향해 잭나이프를 내리찍었다. 달빛 속에서 은어 한 마리가 비늘을 뒤채며 빠르게 내리꽂히는 것처럼 보였다.
쫘악.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의 한가운데가 잭나이프 끝에서 한 줄로 길게 찢어지면서 그 틈새가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찢어버리다니. 고묵이 빈혈을 앓듯 이마를 짚으며 침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아름다운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련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방울 소리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달빛이 점차로 밝아지는 듯하더니 주변의 풍경들이 햇빛이 비치는 스크린 속의 풍경들처럼 하얗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 p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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