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나 할머니 댁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오래된 저택인데, 어렸을 때 거기 갔다가 다락방에서 바퀴벌레를 보고 진짜로 기절했대.” “다시 한 번 대단히 미안하다, 야.” 유나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호준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유나는 뭔가 의아해서 멈칫하고 물었다. “너네 누나 할머니 댁이면 네 할머니 댁인 거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 “아, 아빠가 재혼하셨거든. 누나는 엄마, 그러니까 새엄마 딸이야. 말하자면. 이젠 우리 누나지만.” “아, 그래?” “응. 우리 누나 친아빠는 영국 사람이야.” “오!” 유나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임호준, 넌 인생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글로벌해.” 호준이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을 달싹거리다 풋,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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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 가지 맹세할 게 있어.” “맹세?” “굳게 다짐한다고 약속하는 거야.” “뭘?” “너 절대 남한테 먼저 욕하면 안 된다! 그럼 아주 곤란해져.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어, 약속해. 나 약속 잘 지켜.” 호준이 말에 유나가 한 걸음 다가서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본때를 보여 주는 용으로만 쓰는 거야.” 호준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유나는 어깨를 쭉 폈다. “내가 너한테 마음의 빚도 있고, 넓적송장벌레 사건에 대한 책임도 있으니까 가르쳐 주긴 할게. 대신 이건 꼭 비밀로 하는 거다. 왜냐하면…….” 호준이는 유나의 말을 기다렸다. “소미가 그랬어. 아무리 창의적인 욕이라도 그런 말 안 하는 내가 더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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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건 발음이랑 단어 생김새야. 자음이 두 개씩 붙은 것들, 쌍자음을 잘 봐 봐. 거기에 창의적인 욕의 재료가 그득그득하다고.” “쌍자음? 오, ‘더블 자음!’ 창의적인 욕을 만드는 데에는 과학적인 원리가 있구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오, 혹시 이건 세종대왕님의 빅픽처?” 유나의 말에 호준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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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할머니 따라서 뉴스에 나오는 흉악한 인간이나 드라마 보다가 주인공 괴롭히는 아주 못된 녀석들한테는 하지. 가끔은 욕 좀 해야지 어떡하냐! 내가 눈사람도 아니고.” 갑자기 소미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소미의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 듯 보이자 유나는 천천히 일어나 소미 옆쪽으로 와 두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소미야, 있잖아, 임호준이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더라고. 내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곤란했어.” “…….” “창의적인 표현을 배우면서 우리말도 늘리고 싶대. 애들한테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나 봐.” 생각에 잠겨 있던 소미가 마지못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었지. 그래서 너한테 창의적인 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건데.” 유나는 무성한 등나무 이파리를 올려다보았다. 소미는 말없이 유나를 따라 위를 올려다보며 잠자코 있더니 차분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다고 다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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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미는 개미 행렬을 가로막을까 싶어 양발을 들어올렸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등나무 잎사귀들이 흔들리며 땅에 점점이 번진 빛이 흔들렸다. “볕뉘.” 소미가 중얼거렸다. “응?” “보이지? 볕뉘. 작은 틈에 잠시 비치는 햇빛.” “와! 그런 말이 있어?” “순우리말이래. 순우리말 사전 보다 우연히 알았어.”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를 추켜올렸다. “소미야, 나는 창의적인 욕의 창시자이고, 너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의 전문가인 것 같아.” “뭐?” “이것 봐. 역시 우리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베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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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도 나지만 동생들이 보고 따라 할까 봐 걱정해서 더 그래. 내가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소미의 말에 유나의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유나는 손을 내려 무릎에 얹었다. “있잖아, 소미야. 그런데 네가 꼭 동생들한테 본보기가 될 필요가 있어?” “응?” “아니, 우리 오빠만 봐도 모범은커녕 아주 앞날이 걱정되거든. 내가 뭘 보고 배우겠냐 이거야. 우리 할머니 오마리아 씨도 나한테 오빠 닮으란 소리 절대 안 해. 나중에 크면 할머니한테 기댈 생각 말고 각자 잘 살라고 하지.” “…….”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왜 동생들한테 모범이 되어야 하냐 이거야. 그냥 네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어쨌든 내가 첫째니까…… 바르게 잘 커야 한대. 우리 아빠도 그랬어.”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도, 뭐더라…… 응. ‘타인의 귀감’이 되는 어린이야. 너 같은 아이가 모범이 아니면 다른 애들은 다 개망나니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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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야, 아까 ‘그래, 이 맛이야’라고 그랬나?” “응. 옛날에 조미료 광고 카피였대. 할머니가 가끔 어묵탕이나 잔치국수 맛볼 때 그러시거든.” “생각해 보니까, 욕도 조미료 같은 게 아닐까?” 유나가 양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오!” “그렇잖아. 너무 과하면 짜고 쓰고 해롭고.” “맞아. 길들여지면 중독성 있고.” “그런데 전혀 없으면 뭔가 심심하고 단조롭고.” “브라보!” 유나는 벌떡 일어나 소미를 향해 박수를 쳤다. 연주회에서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이 일어나서 힘차게 치는 기립 박수 같았다. 소미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유나는 다시 벤치에 앉아 등나무 줄기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넌 하지 마, 소미야. 평소에 네가 하는 말은 국물로 치면 맑고 담백한 맛이야. 건강하고 편안해.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그렇게 되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그래도 가끔 필요할 땐 후추랑 고춧가루를 뿌려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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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말 이해하고 있는 거 맞지? 아무튼 알아보니까 고등학생 랩 대회가 있더라. 난 우리 오빠가 거기 나갈까 봐 무서워. 우리 오빠 랩은 아주…… 말을 말자. 누가 알아? 네가 나중에 거기 나가서 상도 받고 그럴지.” 호준이는 잠자코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나는 괜히 스트레칭을 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일단 도전해 보는 게 중요하니까. 창의적인 욕 재료를 가지고 신선한 랩 가사를 써 보라고 하다니, 나 좀 대단한 것 같아.” 호준이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나에게 물었다. “그럼 나 랩 가사 쓸 때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어? 부탁할게.” 호준이 말에 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훌륭한 제안을 새로운 의뢰로 갚다니, 너도 참.” 머쓱해진 호준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때? 공동 작사가로 이름 올려 줄게. 나중에 내가 성공하면. 이유나 사부님.” ‘사부님’이라는 소리에 유나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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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언니.” “어? 너는…… 소은이 친구 맞지? 아, 소이 친구던가?” 소미는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둘 다 친해. 근데 언니, 욕 좀 하지?” 소미는 웃다 말고 멈칫했다. “뭐라고?” “나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소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다음 아이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쌍둥이가 그랬어? 내가 욕 좀 한다고?” “응. 어쩌다 한 번씩 하는데 속이 엄청 시원하다던데? 진짜 욕도 아닌데 말이야.” 소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어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저만치서 유나가 발차기 동작을 하다 말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유나는 소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고는 앞으로 달려 나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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