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이 사람의 마음을 사는 방식은 특별하지 않다.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그가 자신을 던질 때 주위의 몇 명 또한 부득이하게 혹은 감동해서 그와 운명 공동체가 되는데, 일단 함께하면 유방은 이 운명 공동체를 중핵으로 삼아 세를 불렸다. 훗날 대업을 이룬 후에도 그는 문지기조차 꼭 옛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특이한 격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분이 낮을 때나 고귀해진 후에나 상하좌우 누구든 술친구 대하듯 했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여지없이 그에게 감복했다.
--- p.72~73, 「1부 제2장 비범한 자와 평범한 자」중에서
진을 무너뜨린 조역은 유방이었다. 그는 항우가 진의 주력과 싸우는 사이 관중에 들어가 ‘약법삼장’을 선포한다.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인 구호였다 하더라도 전도된 세상을 바로잡는 첫 포효였다. 천하를 다스릴 때 전투와 법은 말단일 뿐 오직 정치가 바로 서야 위태롭지 않다. 다스림을 아는 자에게는 무리가 모이니 그 노도 같은 무리를 누가 당할 수 있으랴. 공자께서 하신 말이 그르지 않다. 덕 있는 이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 그예 진은 무너졌다. 그러나 누가 이 거대한 체제를 이을 것인가?
--- p.146, 「1부 제5장 진이 멸망하다」중에서
하지만 유방도 싸울수록 뻔뻔스러워지고 야망이 견고해졌다. 이번에 유방은 관중으로 가지 않고 하후영을 데리고 황하를 건너 한신의 진영으로 향했다. 사자를 사칭하여 한신의 진영으로 들어간 후 한밤중에 그의 군권을 빼앗아버렸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한신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유방은 장이에게 조나라 군사를 거두도록 명하고 한신에게 제를 치라 명했다. 때는 7월 여름, 유방이 다시 한신의 군대를 얻으니 위세가 살아났다. 세 번째 단신으로 달아난 왕이 그런대로 권위를 유지한 것은 한신의 충성과 힘 때문이었다.
--- p.227, 「1부 제7장 초한쟁패 2」중에서
유방은 한신을 잡고 바로 관중으로 도읍을 옮기고 후속 조치를 취한다. 한신의 땅을 둘로 나눠 전장에서 공을 세운 유씨 종파의 유가劉賈를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동淮東을 다스리도록 하고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회서淮西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어 동쪽에서 가장 비옥하고 넓은 땅인 제에 아들 비肥를 봉했다. 이리하여 천하의 요지는 모두 유씨의 차지가 되었으니 아들과 형제가 배반하지 않는다면 한의 대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유방이 원한 것은 유씨 천하였다.
--- p.263~264, 「2부 제9장 건설자의 풍모와 철학」중에서
무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자백가는 이른바 동양사상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원형 이상이다. 거의 20세기 초반까지 동양사상은 제자백가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1세기인 지금, 사회주의를 겪은 중국에서마저 공자나 묵자는 다시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비록 그들의 학설이 오늘날의 세분화된 분과 학문처럼 세련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넓은 시야와 진지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 p.374, 「2부 들어가며」중에서
결국 군주의 권한과 그 권한을 행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요지다. 법가 측의 주장은 명백하다. 군주와 신하는 상하의 주종관계이며, 또 군주는 본심을 숨기고 신하를 감시·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통렬히 반박했듯이 숨김과 감시·통제는 상하의 단결을 해칠 수 있다. 또한 플라톤이 지적했듯이 통치권을 감당할 수 없는 한 군주에게 권한이 집중될 경우 국가가 파멸할 수도 있다. 필자는 『관자』에서 절충의 단서를 찾았다. 물론 국가의 수장은 위세를 갖추어야 하고, 자신의 권한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거대한 조직이기 때문에 그 수장은 개인의 수양을 멈출 수 없다. 또한 군대를 움직여야 하기에 사안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p.475, 「2부 제2장 다스림의 근본」중에서
공자는 법을 기준으로 하면 상하의 종법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자산은 법만이 나라를 구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모든 나라가 변법變法, 즉 법제의 개혁에 골몰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제자백가가 이 흐름을 놓쳤을 리가 없다. 법은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이익을 분배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에 법을 둘러 싼 당사자들 사이의 투쟁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 p.480, 「2부 제3장 법치와 질서, 경제, 전쟁」중에서
예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예의 본질이라 하니 혹자는 조선시대의 예송禮訟논쟁과 같이 실상과 떨어진 케케묵은 고담준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예론은 역사와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예론은 ‘왕을 중심에 둔 신분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계층 간에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계층 간의 의무와 권리는 상호적인가, 일방적인가’, ‘통치의 근본 원리로서 예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 사회 전반의 첨예한 문제들이 예를 중심으로 부딪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묵자를 필두로 한 개혁파는 “당신들이 말하는 예란 차별과 착취를 고착화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순자를 필두로 한 보수파는 “예가 없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면 일반 백성이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라고 반격한다. 투박한 고대의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 진보·보수 논쟁 에 하등 뒤질 것이 없다. 따라서 예론은 말로 된 계급투쟁이다.
--- p.556, 「2부 제4장 전국시대의 계급투쟁, 묵자와 순자의 예 논쟁」중에서
장자는 오늘날 흔히 무위자연을 누리는 신선 같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맹렬한 투사였다. 모든 것을 삼키려는 기세로 커지고 있던 무소불위의 괴물 앞을 해진 옷을 입은 그가 가로막고 있다. 행색은 보잘것없지만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그 괴물은 이 초라한 사나이를 삼키지 못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삼키면 자신을 태울 불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그는 전국시대 전체와 맞선 휴머니스트이자 중국사 전반에 걸쳐 모든 전체주의에 맞선 생명주의자였다. 급기야 오늘날 그의 사상은 중국이라는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얻었다.
--- p.648, 「2부 제5장 장자, 절대적 생명과 평등을 부르짖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