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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브닝,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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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브닝,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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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0쪽 | 296g | 127*188*20mm
ISBN13 9791130612300
ISBN10 113061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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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라고 하자. 있는 그대로 함부로 부르면 욕처럼 들리니까, 펭귄이라고 하자. 가끔 입에 좆을 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으로는 부드럽게, “오늘 기분 참 펭귄 같네”라고 하자. --- p.8

가족들이 첫 생리를 시작한 딸을 축하하는 일은 텔레비전 광고에서라도 있지만, 첫 사정을 기뻐하는 모습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생리는 성숙의 신호다. 그러나 사정은 이제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는 놈이 되었다는 증거다. --- p.12

부끄러웠던 기억은 부글부글 자꾸 떠오른다. 퐁, 부끄러움 하나를 터뜨렸는데, 퐁, 퐁, 다시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부끄러움이 솟아오른다. 국자를 들고 떠오른 부끄러움을 걷어내고, 걷어내고, 다시 버리고, 조금 더 끓이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고요하고 차분하게 보글보글거리기를 기도하면서. 아주 작은 부끄러움은 여전히 솟아오르겠지만. --- p.27

아빠는 그래도 네가 이 집의 기둥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빠도 나를 진짜 기둥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집은 기둥 없이 지붕만 붕 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식으로도 지붕이 무너지지 않았다. 기둥 없이도 사는 법을 배웠던 것일까. --- p.84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성공이란 말이다,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성공이다…… 아빠는 이런 말을 늘어놓다가 코를 골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불쌍했다. 지금도 위기라는 말은 그나마 그럴듯하게 귀에 남았다. 방학 때 귤을 까먹으며 금모으기 운동을 보고 뭉클 감동했는데. 그 뒤로 IMF가 경제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를 바꿔버릴 줄은 몰랐다. 금방 극복했다고 믿었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IMF의 자식이었다. --- p.125~126

전공과 적성은 무관했고, 어떻게든 졸업은 다 하게 되어 있으며, 졸업한다고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얻을 리도 없었다. 적성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은 가끔가다 술자리에서 나누면 될 문제였다. 적성처럼 그럴듯하면서 나쁜 말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잘 찾아보면 잘하는 게 하나씩은 있다는 말은, 확실히 거짓말이었다. 위로는 되겠지만 억지는 억지였다. --- p.144

예전에는 혼자 울지 않았다. 울음은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울 만큼 기분이 상했으니 누군가 달려와서 위로해줘요, 나는 지금 슬퍼요, 그게 우는 이유였다. 혼자 운 적은 없었다. 혼자 울면서, 나는 나를 처음으로 분명히 바라볼 수 있었다. --- p.204

전역한 첫날 오전엔 세상이 내 것 같았지만 오후부터 바로 불안해졌다. 행복이나 자신감의 유통기한은 스물네 시간도 되지 않았다. 편의점 삼각김밥 유통기한과 엇비슷했다.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것 같았는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라기보다 군대보다 딱딱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 p.234

캠퍼스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강의실을 혼자 나오면, 점심을 혼자 먹고 다시 캠퍼스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오면, 리포트를 다 쓰고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펭귄을 만지작거리다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면, 가끔 게임하느라 과제를 잊으면,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을 모아서 대출한 등록금을 갚고 영수증을 받으면, 다 갚았다는 영수증을 괜히 벽에다가 하나씩 붙여두면, 벽에 영수증을 붙이는 것보다 대출 이자 갚기가 더 힘들어지면, 빌리는 속도를 갚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되면, 아르바이트를 해도 대출금이 더 늘어나는 상황만 마주하게 되면, 집에 가도 아빠와 갈수록 대화가 없어지면, 아빠에 대한 여러 가지 착각이 들면, 성적을 확인하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나서면……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자기혐오는 잠깐으로 끝내고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누구도 자신을 영원히 미워할 수는 없었다. --- p.242

언젠가부터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봤던 그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과 입술과 볼이 약간씩 처진 것 같은, 표정. 말을 걸어줘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표정. 보고 있으면 힘내라는 말만 간신히 건넬 수 있는 표정.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는 표정이었다.
--- p.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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