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났어, 넌 죽은 목숨이야.
---「첫 문장」중에서
권총을 빠져나올 총알의 충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1초가 1분처럼 더디게 흐르기 시작했다. 곧 내 목숨을 거둘 사내의 거친 호흡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고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도 그대로였다. 멀리서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간간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짙은 백리향 향기에 머리가 아찔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마 고개를 뒤로 돌릴 용기가 없었다. 별안간 앞쪽에서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쏘지 말아요, 아빠, 그 사람이 아니에요!」
---「열네 살. 한밤의 소동」중에서
개미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처한 조건을 생각하게 했다. 혹시 우리도 생살여탈권을 쥔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관찰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 거대한 존재가 외계에서 온 어린아이거나 초보 신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유리병에 갇힌 주인공 개미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림으로도 그렸다. 여덟 살 하고 6개월에 쓴 여덟 장짜리 이야기가 바로 『개미』의 첫 버전이었던 셈이다.
---「여덟 살. 거대한 세계 속 조그만 존재」중에서
『듄』은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물리적 경험이다. 그 책에는 말을 하는 등장인물의 머릿속 생각이 글로 적혀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아주 긴 대화를 읽게 되는 셈인데, 이를 통해 말 뒤에 감춰진 인물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 전권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나는 궁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말과 생각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존재하는 걸까?
---「열여덟 살. 앞으로 앞으로」중에서
뉴욕 5번 애비뉴에서 스리 카드 몬테 속임수를 펼치던 사내, 우리와 카풀을 했던, 꿀벌을 무서워하던 이란계 수학 교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누가 자기 물건을 훔쳐 갈까 전전긍긍하던 펑크족, 뉴욕 기차역에서 만난 노숙인들, 로스앤젤레스 주택가를 지키던 은퇴자 순찰대……. 그 실제 인물들이 훗날 모두 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에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열아홉 살. 미국 무전여행」중에서
「선생한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직업이 뭔가요?」
「아, 작가입니다.」
「작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월세를 내야 하니까요.」
「월세를 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녁에 들어가 밥을 먹을 곳이 필요하니까요.」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살아야 하니까요.」
「아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음, 그건…….」
뱃사공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서른 살. 인도로 모험을 떠나다」중에서
기습하듯 어둠이 찾아온다. 출발의 흥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 한 장 한 장 채워 나가지만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간다. 그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일지 모른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출발의 흥분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 흥분을 간직한 상태로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 작업에 투자해야 한다. 발걸음이 무겁지만 멈추면 안 된다. 뒤돌아보지 말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루에 최소 다섯 장, 그 다섯 걸음이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그렇게 쉬지 않고 계속 쓰다 보면 어느새 절반이 넘게 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 비가 그치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산 정상에서 해가 솟아오른다. 리듬을 잃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조금씩 마른 땅이 나타나고 어느 순간 바닥이 바짝 말라 있다.
---「서른한 살. 인질로 잡힌 소설」중에서
사인받을 책을 내밀며 많은 독자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책이라면 질색인데, 이걸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마디 적어 주시겠어요?」 나는 고심하다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절대 읽지 말 것.〉
---「서른한 살. 인질로 잡힌 소설」중에서
부침을 거듭하면서 작가라는 직업이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 방〉 터뜨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규칙적인 리듬을 유지하면서 지치지 않고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게는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할 의무가 있다. 그때부터 매년 10월 첫 번째 수요일에 새 책을 선보이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엄격한 글쓰기 규칙을 정했다.
---「서른네 살.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중에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아버지는 걷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할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궁금하구나, 베르나르, 난 좋은 아버지였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버지였어요.」
가슴이 저려 왔다.
「아버지는 절대 강요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해주셨어요. 저를 믿어 주셨으니까요. 그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알아요. 그래서 저도 아버지처럼 제 자식들에게 똑같은 선물을 해주고 싶어요.」
아버지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렸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행운아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완벽한 아버지였다. 〈다른 생에서 당신과 다시 만나 또 부자의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라고 내가 한 단편에 쓴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쉰여섯 살. 영혼은 내 말을 듣고 있나요?」중에서
여전히 내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 새 책을 쓸 때마다 극도의 부담과 위험을 느낀다. (……) 의심과 당혹감과 도저히 마침표를 못 찍을 것 같은 자신감의 결여는 창작 과정의 일부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포기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해 내는 것뿐이다. 독자들이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다 마지막에 〈와우〉 하는 탄성과 함께 책을 덮게 할 강력한 엔진을 찾아내는 것뿐이다.
---「쉰여덟 살. 대중 앞에 서다」중에서
모든 것은 기억이다. 지금 여든다섯 살인 어머니 셀린은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나 또한 모든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필립 K. 딕이 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주인공이 한 말처럼 〈눈물이 빗물에 섞이듯 이 모든 순간이 시간 속에 희석될까 봐〉 두렵다. 그동안 내가 독자들에게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가 벌써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그토록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나 보다.
---「예순 살. 에필로그」중에서
보다 소박하게 되짚어 보면, 나는 지금까지 2만 2천 번의 일출을 경험했고 5만 시간 가까이 글을 쓰면서 정신을 통한 세계의 탈출을 만끽했으며 무엇보다 조나탕, 뱅자맹, 알리스, 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네 살짜리 알리스는 벌써 책과 동물과 지식에 호기심을 보인다. 딱 한 가지 바꾸고 싶은 게 있긴 하다. 삶을 대하는 태도. 다시 할 수만 있다면 삶의 순간순간을 더 음미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예순 살.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