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성아, 엄마가 너 예뻐 죽겠나 보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인가가 휙 일어났다. 나는 그 마법 같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에게 철저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생명에 대해 내가 느끼던 감정,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커지던 감정의 정체가 밝혀지던 순간이었다. 그건 나한테 아이를 예뻐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마음이 점점 자라나면서 내가 행복해질 거라는 예감이었다.
--- p.9~10
그날 아들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그간의 모든 사정을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여덟 살짜리 아이는 그동안 엄마가 없는 아이라는 사실이 싫었던 거라고,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어서 엄마가 생기길 소원했던 거라고, 아빠 여자친구라면서 가끔 같이 나들이 다녔던 아줌마인 내가 빨리 엄마가 되기만을 기다렸던 거라는 그 마음이, 아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파악됐다. 그러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벅차올랐다.
--- p.19~20
아들은 본능적인 지혜로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뿐이었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걸 타고난 현명함으로 알았던 거였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줄 안다는 건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자산인가.
--- p.21
아들을 돌보며 어쩌다 내 안에 이런 건강한 사랑이 들어와 있을꼬 신기하여 들여다보니 그 사랑의 원천은 먼 옛날 내가 자랄 때 넘치도록 부어준 엄마의 사랑이었다. 엄마 덕분에 만들어진 내 안의 사랑, 그 자산으로 나는 아들을 행복하게 돌볼 수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지를 알게 해준 것이 아들이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엄마의 사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서 자라나 아들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핏줄이 연결되지 않았어도 그렇게 엄마와 나, 우리 아들은 사랑으로 연결된 식구다.
--- p.38
폼나는 직장이 없으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리라는 상상은 그 씨앗은 엄마로부터 떨어졌을지 몰라도 결국 내가 물 주고 양분 줘서 키운 판타지에 불과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행복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살아왔는지 알게 됐다.
--- p.44
조그만 신문사의 조그만 잡지 부서의 사무실은 조그마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서로 다 들리는 구조였다. 전화기를 들어서 “저는 아무 신문사의 아무개입니다. 아. 무. 신문사요. 아.무. 신문이라고요! 이렇고 저런 일로 잠시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묻고 나서 본론을 이어가는 통화 내용을 사무실에 같이 있는 열 명 남짓 직원이 다 듣는 그 구조에 나는 끝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다. 취재 전화를 걸어야 할 때면 전화번호 누르는 것 자체부터 너무 무서워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혈압이 오를 정도였다. 실제로 병원에 가서 혈압을 재보니까 200이 넘게 나온 적도 있었다. 그 시절부터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해서 지금껏 먹고 있다.
--- p.48~49
희한하고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토록 고민하고 저울질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한집에서 살게 되자마자 바로 아이한테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이한테 홀딱 반하는 데 두 주일도 안 걸렸던 것 같다. 데이트할 때 아빠 따라온 아이로 만날 때는 몰랐는데 한집에서 내 손으로 돌봐주기 시작하자 며칠 만에 아이가 달라 보였다. 무작정 예뻤고 그 조그만 게 엄마 없이 여태 살았다니 가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눈에 보이는 아이 행동 하나하나에 온 마음과 신경이 다 쓰였다.
--- p.62
내 손길, 내 관심, 내 애정에 한 인간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그 생명이 시들지 않고 힘차게 자랄 수 있도록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줘야만 했다. 어떻게 안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나 아니면 꼼짝없이 말라죽을 화초 같은 어린 생명에게 내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63
그렇게 사랑과 더불어 세상이 달라지는 건 태어나고 처음 해본 경험이었다. 예전에 남자들과 했던 그 어떤 연애도 세상을 이렇게 달라지게 만든 적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표현하느라 화면에 입히는 색을 바꾸는 것처럼 세상의 색깔이 달라졌다. 숨 쉬는 공기의 냄새도 달라진 것 같았다. 아이와 사랑에 빠지자 모든 게 달라졌다.
--- p.65
아이는 내가 견뎌야 할 ‘남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있으며 내가 없으면 안 될 작은 생명이었고 나의 하루를 기쁨으로 채워주는 ‘나의 아이’였다.
--- p.68
남편은 다시 “엄마는 자애롭게 아빠는 엄격하게”주장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그게 평소의 신념이었고 아이 교육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 관념이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설득해야 했고 매번 “엄마 아빠는 애가 밖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해야 했다. 그럼 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들어주고 인정해줬으니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 p.83
다른 꽃나무들보다 늦게 새순이 돋는 대추나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봄에 가장 늦게 새순을 내지만 늦가을이 되면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 같은 사람도 좋은 거라고. 우리 준성이는 학교 성적 따위와 아무 상관 없이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옆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 엄마인 내가 굳게 믿는다면 아들의 미래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 p.97
준성이는 엄마가 내게 준 크고 무한한 사랑을 내가 모르고 살아가던 때, 그 사랑에 감사는커녕 원망만 품고 오래된 상처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내게 와서 내 안에 있던 사랑을 일깨워줬다. 그 사랑이 엄마로부터 물려받아 생겼음을 알게 해줬다. 엄마가 내게 준 사랑이 나를 통해 내 아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엄마와 나와 아들 준성이 삼대는 사랑의 순환 사이클로 연결된 가족이다.
--- p.138
내 아들을 낳아준 그 사람, 아들의 친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내 아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 아이의 행복을 무엇보다 간절하게 기원하는 사람이다.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므로 나와 한배를 탄 한편이고 아들이 있는 한 서로 끊어질 수 없는 동지이다. 아들 인생에서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지, 아들을 위한 마음에서 누가 더 진심인지를 놓고 대결하는 경쟁자 같은 것이 아니다.
--- p.156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 ADHD 아이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몇몇 아이들은 거칠게 대하고 몇 명 정도가 선생님 종용에 마지못해 끼워주는데 그 아이를 무시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어울리는 애가 준성이 하나라는 얘기를 담임으로부터 들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던 흑석동 골목길 내내 울었다. 이런 축복, 이런 은혜가 나한테 와줬다는 게 믿을 수 없이 감사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p.160
첫번째 남편은 내가 박사 학위를 못 딴 처지라 한국에 돌아가기 죽어도 싫었을 때 청혼으로 나를 구원해줬던 사람이다. 7년 후에 우울증이 회복되어 이제 좀 살 만해진 내가 모국어 쓰는 편한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붙잡거나 말림으로써 내 마음 힘들게 하지 않고 잘 가라고 축복하며 보내준 사람이다. 그 사람과 평생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고 돌아왔을 때는 눈물이 안 났는데 같이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가우디 건물을 보면서는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p.174
신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을,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던 청춘의 꿈들을, 내가 살아야겠다는 이유로 등 돌리고 떠나온 시간들을 부디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서로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면 의지할 곳 없는 이 세상, 우리는 너나없이 얻는 것보다 놓치는 것이 많은 듯해 불행하고 마음과 젊음을 걸었던 꿈을 지키지 못해 서글픈 존재들이니, 부디 서로를 향한 온정과 연민에 기대어 이 고달픈 한 세상을 견디어 살아가게 하소서.
--- p.175
그때 비로소 알게 되는 거지. 봄에 피는 꽃들이 누구에게나 감탄스러운 것처럼, 겨울을 밀어낸 자리에 쏟아지는 봄볕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것처럼, 살면서 누리는 행복이란 타고난 재능이 잣만하거나 태산만 하거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걸. 그런 날이 올 거야 아들.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키우면서 깨달았던 것처럼. 그래서 세상을 견뎌내는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 p.192
내가 만일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또 하나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그런 괴로움과 미움을 마음에 쌓아두기에는 스무 살은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 p.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