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은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음을 종지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선요』의 첫 구절입니다.
서문을 강의하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이 서문의 한 구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구절에 우리가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오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많은 법을 설하시며 드러내시고자 한 종지도 이 글귀만 잘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상권, 40쪽)
의심은 믿음으로써 체(體)를 삼고, 깨달음은 의심으로써 용(用)을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십분(十分)이면 의심이 십분이고, 의심이 십분이면 깨달음이 십분이다.(상권, 347쪽)
선에서는 이것을 ‘근본자리는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똑같은가? 우리 마음을 쓰는, 작용하는 기능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볼 줄 아시고 들을 줄 아시고, 우리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압니다.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드러내는 효능과 우리가 드러내는 효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능은 똑같은데 효능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공덕성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과 우리의 공덕에 차이가 납니다. 부처님은 연기로 이 세상을 보고 연기법으로 삶을 사시기 때문에 모든 생명 세계에 행복을 주고 자유로움을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공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그대가 나의 생명의 은인이요, 그대와 나의 생명자리가 끊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상권, 44쪽)
불자님들이 수행을 할 때는 첫째, 열심히 경학을 배우고 둘째,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착한 인성이 살아나면서 화두에 대한 의정이 물안개 피어오르듯 자연스럽고 쉽게 올라오게 됩니다. 그때 의정을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 열이 올라와서 생기는 상기병도 없습니다. 신심이 지극한 사람은 상기병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 없이 화두만 타파하고 견성하면 된다는 의욕만으로 공부를 하면 급한 생각이 들고 상기병도 됩니다.(하권, 34쪽)
이 자리는 우리가 중생심이라는 집착을 깨뜨리고 부처의 세계에서 그 소식을 그대로 드러낸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도라 할 수 있고 안신은 곧 무심(無心)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심은 평상심(平常心)입니다. 비유하자면 무심은 손등이요, 평상심은 손바닥입니다. 손등과 손바닥은 하나의 손입니다. 하나의 손에서의 작용이 하나는 지혜로 드러나고 하나는 자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둘로 나눌 수가 없고 하나입니다. 무심과 평상심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무심과 평상심은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상심이 드러날 때 무심이 함께 가고 무심할 때 평상심이 함께 드러나는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상권, 113쪽)
알음알이로 분별 번뇌의 물결을 일으키면서 화두공안의 해답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화두에는 그 해답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중생의 분별심을 넘어서서 절대적인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그 경지를 수용할 뿐이고, 인격적으로 그렇게 생활할 뿐이지, 해답으로써 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고봉 스님이 말씀하신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내려앉는 체험, 중생심이 완전히 불심의 세계에 들어가 티끌만한 번뇌와 이기심과 중생 업식 모두가 불심으로 전환되어 중생심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경지를 스스로 체험하는 것입니다.(상권, 161~162쪽)
예를 들면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서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제가 이제 확실히 믿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가 “무엇을?”이라고 물었는데, “제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 그 말 하는 자체가 눈에 티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자리에서 볼 때는 견성했다는 것 자체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확실히 체험되어 생활 속에서 인격으로 그대로 보살 부처행을 할 경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치적으로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