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추락』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두 번째 수상하게 된 작가 존 쿳시. 그를 아는 국내 독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남아공 출신의 작가인 쿳시는 지난 83년 『마이클 케이의 삶과 세월』로 처음 '부커상'을 수상한 데 이어 세계적인 문학상을 휩쓸고 있는 정상의 작가이지만, 국내에서는 문예지 등에 몇 번 소개된 것이 전부일 뿐 장편소설로는 『추락』이 국내 독자들과 처음 만나는 셈이다.
"철저한 자기절제로 감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평을 받는 그는 자신의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중 앞에 나서길 극도로 꺼리는 은둔의 작가이기도 하다. 두 번에 걸친 부커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인데, 대신 "문학상이 갖고 있는 상업성이 싫다"는 짤막한 메시지를 수상소감으로 밝힌 바 있다.
이 소설은 냉소적인 백인 대학교수와 아프리카의 땅을 사랑하는 그의 딸이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작품을 읽다보면 한 가지 독특한 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현재형시제가 쓰인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단문을 사용하여 한 문장이 두 줄을 넘기가 힘들다. 그러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 선택한 단어 하나 하나가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담백하고 또한 강렬하다. 쿳시는 가장 쉬운 문체를 사용하면서도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진실을 말하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것이다. 특히 제자와의 스캔들로 징계되는 교수, 타인의 딸에게 가한 상처가 대를 이어 자신의 딸에게 몇 배로 되돌아오는 상황, 또한 교수가 구상하는 오페라의 바이런에 얽힌 일화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멋진 플롯을 이루어 낸다.
정렬적이지는 않지만 강렬한 욕구를 지닌 데이비드 로리 교수는 '이 나라의 싫증난 젊은이에게 drink와 drink up, burned와 burnt의 차이'를 설명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는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제자에게 빠져들고 충동적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며 결국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이 사건은 후에 그의 딸 로리가 겪게 되는 강간사건과 일정한 축을 이루며 데이비드가 추락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데이비드의 추락 과정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며, 이것은 여전히 흑백갈등이 잔존하는 남아공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교수의 딸인 로리는 흑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 농장에 고립된 백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작가는 이를 통해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한 정권의 양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흑인들이 그녀를 강간하며 내보이는 원한과 증오는 남아공 흑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부녀가 느끼는 공포와 위기의식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남아공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농장을 떠나라는 데이비드의 권유 앞에 로리는 해결되지 않는 폭력에의 노출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그들의 땅에 사는 대가로 담담히 받아들이며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빠, 이건 어디까지나 제 문제고 제 인생이에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저는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살수 없어요.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아버지일 수 없듯이 말이에요."
결국 자신의 땅을 전부 흑인들에게 넘겨주고 강간의 흔적이 남긴 아이을 낳으면서도 그녀는 완강하다. 유죄는 인정하되 참회는 할 수 없다는 데이비드의 고집을 꼭 닮은 그의 딸 로리는 그가 타인의 딸에게 가한 고통을 몇 곱절로 되돌려 받으면서도 어설픈 화해나 비겁한 도피보다는 철저한 체념을 선택한다. 이러한 루리의 결심은 마치 남아공의 현실도 수많은 고통과 상처의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듯 처절하게 다가온다.
쿳시는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고 어떠한 가능성도 암시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현재형 문장은 바로 이러한 열려 있는 가능성의 표현이고, 즉흥적이고 불안한 현실의 반영이다. 또한 통속적인 소재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솜씨의 정교함과 압축된 현실 반영, 상징적 결말은 머리 속에 망치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준다.
왜 부커상의 불문율을 깨고 한 작가에게 두 번씩이나 수여되었는지, 왜 세계 유수의 평론가들이 『추락』을 "정상에 오른 작가가 쓴, 음악이 없는 미니오페라"라고 격찬하였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