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더 좋은 생각문장을 찾는 것이다. 언제나 지금 사용하는 생각문장보다 더 좋은 생각문장이 존재한다.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쓰고 고치고 다시 쓰면서 더 나은 생각문장을 찾는다. 반면에 ‘대화’란 둘이 쓰는 글쓰기다. ‘나’가 한 문장을 말하면, ‘너’가 한 문장을 이어가는 공동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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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못하는 사람은 혼자 일방적으로 한다. 잘하는 사람은 교대로 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화는 말과 눈으로 동시에 한다. 대화는 얼굴을 맞대고, 입과 귀와 눈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눈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쉼 없는 시선의 움직임, 홍채의 움직임에서 보듯, 눈은 가장 예민하고 기민하여 솔직하다.
--- pp.52~53
시간과 함께 대화한다는 것은 계속 더 나은 대화를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언행이 언제나 일치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나처럼 누군가를 만날 때 세 번 대화하고, 세 번의 대화가 모두 불일치하는 사람이 좋다. 만나기 전엔 설레는 마음으로, 혹은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상 대화’를 나눠보는 사람이 좋다.
--- p.138
적잖은 사람들이 대화중의 침묵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침묵을 불편해하면 더 깊은 진심을 만날 수 없고, 더 나은 생각문장을 만날 수 없다. 알고 보면 첫 번째 생각보다는 두 번째 생각이, 무엇보다 충분하게 생각한 다음의 생각이 진짜 내가 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침묵하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창의적인 대화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 p.142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너는 아직 몰라도 이미 알고 있다”라는, 더없이 겸손한 역설적 자세로 대화한 사람이다. 이러한 산파술의 태도는 타인과 대화 나눌 때 가장 바람직한 대화 자세다.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놓고, 상대를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게 아니라, 사고하는 과정을 스스로 열어가도록 돕는다.
--- p.186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너의 상태와 기분과 감정에 알맞게 말해야 한다. 너의 상태와 기분과 감정이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때 말해야 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때가 아닌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결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 p.191
위빠싸나 명상에서 ‘지금 여기’란 나의 시공간이라기보다, 나의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가리킨다. 특히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지금 여기’란,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생각문장을 가리킨다.
--- p.192
정말로 눈치 빠른 현명한 독자는 이 규칙들을 실천하려면, 나를 완전히 비우고 너로 채워야 한다는 사실까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좋은 대화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더 나은 생각문장을 찾도록 믿고 돕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역시 처음 하려던 말보다 더 나은 생각문장을 찾게 되는 사건이다.
--- p.209
그런데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나는 온전히 ‘너-되기’를 해야 한다. 나는 내 생각을 비우거나 괄호치고 침묵해야 한다. 오직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상대방을 느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에고를 완전히 죽인다.
--- 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