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에서 첫 수업은 모둠끼리 ‘이글루’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이곳이 마냥 천국인 줄 알고 좋아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남한산다운’ 수업이었다. 어떻게 해야 상상 속 그 아늑하고 완벽한 이글루를 만들 수 있을지, 각기 모둠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스무 명 혹은 서른 남짓은 되었을까. 그 인원이 다섯 모둠 정도로 나뉘었던 것 같다. 준비해 온 반찬 통으로 눈을 퍼 담아 이글루를 만드는 모둠이 있었는가 하면(우리 모둠이 택한 방법이다.), 어떤 기막힌 모둠은 해변에서 모래성 쌓듯이 그냥 눈을 쌓아서 제법 집의 형태까지 갖추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상적이고 완벽한 이글루를 만든 모둠은 딱 한 모둠이었고, 그 모둠은 알맞은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 반찬통으로 눈을 퍼 담아 이글루를 완성했다. 이 모둠만 이글루를 완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딱 두 가지였다. 협동심, 그리고 인내!
나는 학교에 있는 모든 시간이 배움이었다고 단언한다. 치사하지 않게 이기는 법과 당당하게 지는 법은 그 어느 교과서 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술래가 되어 깡통 차기를 하면서 걷는 모습 하나, 눈동자의 깜빡임 하나 보고 그 친구가 누군지 알아맞힐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시간만이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다. 놀이가 얼마나 중요하고 당연한 배움인지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정신 못 차린다고 한마디 한다.
그 후로 우리 반에서는 수업 시간에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단연 나 때문이다. 선생님의 질문에 유일하게 내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도 나 하나였고 질문 없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있다고 손든 아이도 나 하나가 유일했다. 처음엔 다른 친구들이 나를 잘난척하는 모범생이나 나대는 성격의 아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진짜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발표를 많이 하느냐는 거였다. 나는 그 질문에 당황했다. 왜냐고? 궁금하니까. 더 알고 싶으니까.
― 김성은, ‘남한산’이 우리에게 준 ‘특권’ ―
철이 일찍 들었다기보다는 일명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다. 착 한 아이 증후군(The Good Child Syndrome)이란 어린이가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혹은 스스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강하고도 두려운 마음이, 일 때문에 늘 바쁘신 부모님에게 원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감정이 나에겐 계속 있었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착한 아이처럼 되었다. 이런 나에게 나의 감정을 계속해서 물어봐 주시고 위로해 주셨던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나의 감정을 모른 채, 속인 채 살아왔을 것이다. 슬프거나 힘들 때는 울어도 되고 화날 때는 화내도 된다고 하시면서, 제가 울적해 보일 때마다 드라이브도 시켜주셨던 그런 김철수 선생님이 나에겐 너무나 기억에 남는 분이시다.
산속 아지트도 비슷했다. 뒷산에 선생님은 모르시는 곳에 우리들끼리 아지트를 만들어서 가끔 가서 우리끼리만 놀고 즐겼던 기억이 있다. 그때에는 왜 그렇게 노는 것이 재미있었을까? 또 방학 때 오두막을 만들었던 적도 있다. 초등학생이 그 커다란 오두막을 만들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이걸 정말 우리들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있었지만, [중략] 이런 경험 등을 통해 같이 수고하고 같이 땀을 흘렸던 기억들이 우리의 유대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서로 더 친밀해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 정동녘, ‘지금 삶’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을 배우다 ―
그날부터 방학 때까지는 수업 같지 않은 수업들이 계속되었다. 교과서라고는 없었고 교실도 따로 없었다. 눈이 숨 막히게 내린 다음 날에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이글루를 보다가 학교가 끝났고, 그 다음 날은 그 이글루를 따라 만들다 집에 가는 식이었다. 어느 날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아예 등교를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연극 공연은 조촐하게 우리만의 박수로 끝났다. 이게 무슨 학교인가 생각이 들 수밖에.
엄마는 딸이 드디어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이 참 기뻤던 듯했다. 실제로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난시와 근시가 있어 안경을 쓰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한산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시력이 2.0, 1.5까지 올라갔다. 그 이유에는 책에서 눈을 떼고 산을 보며 놀았던 것도 적잖이 있었을 것이다.
- 권새봄, 온몸으로 배우고 함께 달리다 -
특히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는 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쉬는 시간 운동장으로 나와 눈싸움을 하거나 연무관에서 비료 포대를 이용해 눈썰매를 타곤 했다. 땀으로, 눈으로 온몸과 옷이 다 젖은 상태로 교실에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에 큼큼한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우리는 이것마저도 ‘치열했던’ 놀이의 흔적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김대훈, 치열했던 놀이의 흔적이 소중한 기억 -
6학년 하늘마을의 안순억 선생님은 고맙고 존경하시는 선생님이고 아직까지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챙겨주시는 선생님이다. 매일 아침에 1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 뒷산에서 자연에 대해 얘기하시고 우리와 자연이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무와 이야기하고 나무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들을 느끼게 해주셨고, 숲에 누우며 풀이나 낙엽의 감촉과 소리를 느끼며 하늘을 보고 눈을 감으며 한 줌의 여유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셨다.
― 이재경,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한 학교 ―
해가 질 무렵 친구들과 아랫마을까지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통해 산을 내려오며 봄에는 진달래를 따다가 화전으로 만들어 먹고 온산에 진동하는 아카시향에 취해, 아카시아의 달콤한 꿀을 먹고 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구고 물놀이하며 가을에는 나뒹구는 낙엽들과 뛰어놀고 겨울에는 신나는 눈썰매와 함께하며 즐겁게 하교했던 기억들. 이러한 경험들이 당시에는 그저 행복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나에게 알게 모르게 체득된 내 삶의 원동력이었고, 들판에 핀 꽃이 작지만 세상을 이루듯 들꽃 같지만 내 일상을 이루던 자연스러운 배움이었다.
그래서 책상을 만들고 철봉과 샌드백을 만들어 사용했고 강가에 족대를 들고 나가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알음 알음으로 음식점에서 물고기를 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루에 세 번, 해가 떠오를 때·정오에 위치할 때·해가 질 무렵 족대를 들고 보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다 한 봉지에 5천 원을 주고 팔았다. 그때 내가 작성한 가계부에 따르면 평균 지출이 만원이었는데 그렇게 하루 세 번 물고기를 잡고 팔면 3봉지를 팔 수 있었고 다소 무식한 계산 방법으로 나는 내 인생을 연장할 수 있었다.
― 이 정, 자연이 주는 느낌 그대로 자유로운 삶을 찾아 ―
숙제클럽에 가입하면, 아이들은 매주 과목별로 한두 개씩 질문이나 과제가 들어가는 숙제를 받았는데, 보통 국어, 수학, 사회, 영어, 기타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과제는 자기 몸의 부피를 재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방법은 욕조에 물을 넣고 몸의 부피를 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몸속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CT촬영법처럼 몸을 잘게 수평으로 잘라 공간을 계산하는 방법을 추론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부해보니, 이는 사실 적분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너는 항상 오리가 ‘꽥꽥’ 소리를 내고, 고양이가 ‘야옹야옹’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오늘 네가 하루를 지내면서 네가 알고 있던 소리는 전부 잊어버리고 들리는 대로 수첩에 적어보라”고 하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당연히 오리는 ‘꽥꽥’, 고양이는 ‘야옹야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들어보니 오리가 ‘꽥꽥’이라고 소리 내는 것만은 아니었고,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세상의 소리는 어느 하나로 정형화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세상 소리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동물의 소리뿐 아니라, 차의 경적 소리, 발자국 소리를 들리는 대로 다양하게 노트에 적어나갔다.
― 김찬울, 세상 소리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학교 ―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