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미술인가? 나는 모르겠다. 자신이 미술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좀 구식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술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나는 픽처(즉, 묘사)를 만든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수많은 미술사(histories of art)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픽처의 역사(a history of pictures)이다. ---「서론, 픽처, 미술과 역사」중에서
15세기 초 마사초의 십자가 책형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훗날 사람들이 영화나 텔레비전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더 강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원근법 그림의 주제로서 십자가 책형을 선택한 데는 표현적 측면에서의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 주제에는 동작이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움직일 수 없기에 죽은 것이다. 만약 다른 종류의 처형 방식이라면 처형의 전후 과정이 있을 것이다. 선원근법은, 시간을 동결시켜 버린다. ---「5장, 브루넬레스키의 거울, 알베르티의 창문」중에서
거울상(반영 이미지)과 현실은 클로드 모네의 가장 심오한 주제들 중 하나였다. 그의 위대한 수련 회화에서, 회화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물, 그리고 거기에 비치는 하늘과 나무의 거울상이 (즉, 소우주와 대우주가) 하나로 합쳐진 듯 보인다. 모네의 후기 걸작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대한 중국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계적 조화가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플라톤이었다면 그 작품들을 무척 싫어했을 것이다. ---「6장, 거울과 거울상」중에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판에이크의 스튜디오가 세잔과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술가의 고독한 철야 작업을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영화사 MGM의 스튜디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판에이크의 작업실에는 의상, 가발, 갑옷, 샹들리에 등 온갖 장비와 모델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회화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상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그리지 못한다. 그는 헐리우드 영화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했을 것이다. 의상, 조명, 카메라 준비 되었나요? 자, 스텐바이, 큐! ---「7장, 르네상스: 자연주의와 이상주의」중에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그는 철자를 자주 틀리긴 했지만 명민한 관찰자였다)는 그녀가 보내 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감사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작품은 마치 리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같다.” 실제로 그 사진은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작품을 사진화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스푸마토 작품들이 “선이나 경계가 없고, 마치 연기와 같다”고 설명한 바 있다.) 로세티는 회화와 사진 사이의 연관성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4장, 사진과 진실, 그리고 회화」중에서
드가의 회화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1875)을 보자. 르픽 자작이 딸들과 함께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이 회화의 공간 표현은 놀랍다. 픽처 가장자리에 있는 인물 형태가 일부 잘려 나가는 방식은 사진과 약간 비슷하지만, 그 공간은 사진과 완전히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공간을 담을 때 카메라는 실제로 그 공간을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의 이미지는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측정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15장, 사진으로 만든 회화, 사진 없이 만든 회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