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인이란 누구인가? ‘아니요Non’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거부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반항의 시초부터 ‘예oui’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평생 명령을 받아온 한 노예가 돌연 새로운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 ‘아니요’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이런 일이 너무 오래도록 계속되었소”, “거기까지는 좋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되오”, “이건 지나친 일이요” 또는 “당신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소”를 뜻한다. 요컨대 ‘아니요’는 어떤 경계선의 존재를 긍정한다. 두 권리가 맞서 서로를 한정하는 이 경계선 너머까지 상대편이 침범한다는 반항자의 느낌, ‘이건 좀 지나치다’라는 반항자의 느낌 속에서 바로 한계의 관념이 발견된다. 반항 운동은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근거하는 동시에, 정당한 권리에 대한 막연한 확신,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반항자가 가지는 ‘…할 권리가 있다’라는 느낌에 근거한다. 반항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곳에서든 스스로 옳다는 감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항하는 노예가 ‘아니요’와 ‘예’를 동시에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그는 경계선을 인정하는 동시에, 경계선의 이편에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는 자기 속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고집스레 증명하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명령에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핍박받지 않을 권리를 대립시킨다.
--- p.35
부조리의 경험에서 고통이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 운동을 기점으로, 고통은 집단적인 것이 되며 만인의 모험이 된다. 이방감에 사로잡힌 인간이 실현한 최초의 진일보는 그 이방감을 만인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인간 현실이 전체적으로 자아와 세계에 대한 거리감으로 그늘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데 있다. 단지 한 사람을 괴롭혔던 질병이 집단적 페스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고의 순서에서 ‘코기토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반항은 최초의 명석판명한 사실이고, 이 명석판명한 사실은 개인을 고독에서 끌어낸다. 요컨대 반항은 모든 사람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동의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 p.47
반항은 그것이 파괴에 이를 때 논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조건의 통일성을 요구하는 반항은 삶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다. 반항의 심오한 논리는 파괴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논리다. 반항 운동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모순의 어떤 항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반항 운동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예’와 허무주의적 해석이 반항 속에 따로 떼어놓는 ‘아니요’에 동시에 충실해야 한다. 반항자의 논리는 인간 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힘쓰고, 세상에 널리 퍼진 거짓을 심화하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며, 인간의 고통에 맞서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 허무주의적 정열은 불의와 거짓을 증식시킴으로써 광란 속에서 자신의 옛 요구를 파괴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반항을 받쳐주는 가장 명료한 이유를 상실한다. 허무주의적 정열은 세계가 죽음에 내맡겨져 있다고 여기며 광기에 빠진 채 살인을 한다. 반면 반항의 결론은 살인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원칙적으로 반항은 죽음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 p.412
만일 반항이 하나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계의 철학, 정밀하게 계산된 무지의 철학, 위험의 철학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죽일 수도 없다. 반항자는 역사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는커녕, 자기 고유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사상의 이름으로 역사를 거부하고 역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자신의 조건을 거부하는데, 그 조건은 대부분 역사적인 것이다. 불의와 허무와 죽음은 역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들을 거부한다면, 인간은 역사 자체를 거부하는 셈이다. 물론 반항자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는 예술가가 현실 앞에 서듯 역사 앞에 선다. 그는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역사를 거부한다. 그는 한순간도 역사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설령 불가피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범죄에 끼어든다 해도, 그는 그 범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합리적 범죄는 반항의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반항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명백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합리적 범죄는 일차적으로 반항자들에게 저질러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후 신격화될 역사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 p.419
『반항인』을 모두 읽고 책을 덮는 순간에도 반항과 혁명을 똑 부러지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대의 ‘살아 있는 권력’이었던 스탈린주의,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던 스탈린주의를 정당하게 비판하려는 양심적 목소리는 귓전에 생생하게 남는다. 카뮈에게 스탈린주의는 혁명의 얼굴을 한 야만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콘퀘스트에 따르면, 1936년과 1950년 사이에 소련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은 대략 3천만 명에 이른다. 카뮈는 이러한 소련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와 구분하지 못한다. 절대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레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이 우파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했다면, 카뮈의 『반항인』은 좌파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모두가 검은 진실을 말하기를 꺼렸던 시대에, 좌파가 좌파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짧게 말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외친 소년의 용기, 그것이야말로 카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전 세계에 강요된 또 하나의 절대, 또 하나의 극단은 ‘미국의 세계화’ 혹은 ‘세계의 미국화’였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이번에는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절대의 패권을 다투고 있다. 우리 시대의 반항인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 p.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