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병은 환자가 그 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도, 그 병에 대해 정확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의사가 알아서 다 치료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병은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환자 자신이 그 병이 어떤 병인지 아는 자체’가 치료의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
작금의 치료 환경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하겠지만, 무릎 퇴행성관절염 같은 질환은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병입니다. 다시 말해 무릎 퇴행성관절염은 환자 자신이 ‘병의 실체를 잘 아는 것’이 치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병입니다. ---p.23
가끔 무릎 관절염이 심한 환자들에게 치료용으로 ‘오래 걷기’를 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절 치료의 핵심은 관절의 운동범위를 늘리는 데 있지, 무작정 관절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관절 통증이 심하고 보행 자체가 불편할 때는 ‘오래 걷기’ 같은 무릎 관절 노동은 가능한 한 줄이고, 무릎 관절 체조 쪽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치료와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p.50
며칠이 지나서 또 다시 병원을 찾습니다. 이때도 증세는 ‘무릎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심각하게 MRI 촬영을 권유 받기도 합니다. 촬영된 MRI 필름을 봅니다. 또 약 처방을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MRI 상 의심 가는 소견이 있다면서 내시경 수술 등의 수술을 권하기도 합니다. 이때 주로 등장하는 병명이 ‘반월상연골판 파열’ 같은 것입니다. ‘무언가가 파열돼 있다고?’
‘파열’이라는 말에 환자는 겁부터 집어먹고, 수술을 해야 할지 어떨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실제로 무릎 내시경 수술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증세 호전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무릎 내시경 전문가를 찾아갑니다. 그래도 증세 호전은 없습니다. 오히려 무릎은 여러 번의 수술로 더 굳어져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악순환이 일어날까요? ---p.64
퇴행성관절염으로 무릎에 통증이 있을 때, 흔히 치료용으로 뜨거운 찜질을 많이 하게 됩니다. 심지어 붓고 열이 나는 증세가 있을 때도 뜨거운 찜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통증이 호전되는 느낌이 든다는 이유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릎 관절염 치료에는 뜨거운 찜질이 대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뜨거운 찜질이나 뜨거운 목욕 등은 무릎의 연부조직을 일시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해서 통증이 완화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열이 식으면 잠시 동안 유지되었던 부드러움이 금세 사라지고 또 다시 무릎이 아프게 됩니다. ---p.89
엉덩이에서 허벅지까지 당기듯 아픈 좌골신경통이나 엉덩이에서 종아리까지 연결된 듯 느껴지는 다리 저림 증세가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척추신경’을 범인으로 지목하곤 합니다. 그런데 중추신경인 척추신경은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을 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척추신경 자체가 심각하게 눌려 문제가 생긴다면 저림이나 통증 같은 감각신경 증세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대개 근육 마비, 감각 저하 같은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의 증세가 동반해서 나타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겪는 엉덩이와 다리의 통증, 저림 증세가 중추신경인 척추신경의 문제 때문인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p.162
독자 여러분은 허리 디스크가 어떤 병이라고 알고 계신가요? ‘허리 척추 뼈 사이에 있는 디스크(추간판)가 탈출해서 척추신경을 눌러 허리, 엉덩이, 다리 뒤쪽이 당기는 통증을 유발하는 것.’ 이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해부학적, 신경학적 견지에서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자, 보십시다. 만약 척추신경이 무언가에 심각하게 눌려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떤 증세를 일으킨다면, 신경이 하는 여러 기능 중에서 유독 ‘통증’이라는 증세만 생겨나게 하기란 기술적으로 매우 힘든 일로 보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척추신경 같은 ‘중추신경’은 말초신경들보다는 더 복합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중추신경이 심각하게 눌려서 어떤 증세를 만들어낸다면, 이는 근육 마비, 이상감각, 무감각 같은 특징적인 증세를 동반해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p.167
MRI, CT 상에서 보이는 ‘신경을 누르는 모습’을 얼핏 보면 신경 자체가 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눌려 있다.’고 하기보다는 ‘밀려나 있다.’고 하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일 것입니다. 실제 척추신경은 지방조직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형성하며 보호받고 있어서, 주위에서 오는 어느 정도의 압박으로는 신경 자체가 직접 눌리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듯 부드러운 척추신경을 딱딱하고 날카로운 뭔가가 찌르듯이 눌러대는 것은 아닙니다. 부드러운 척추신경을 물렁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조금 밀어놓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허리의 척추 내에서 신경다발인 척수(마미)는 부드러운 척수액 속에 놓여서 더 부드러운 완충지대를 가지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MRI 필름에서 척수 전체가 눌려 있는 소견도 부드러운 액체 부분을 포함해서 밀어놓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척수액 속에 있는 신경들이 직접 눌려지는 것은 덜하게 됩니다. ---p.172
최근 무지외반증으로 수술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여기 설명한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무지외반증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변형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의 통증이 있다고 해도, 덜컥 수술부터 하는 것보다는 수술 후 얻는 것과 잃는 것(장점과 단점)을 파악해 수술의 효율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통증이 줄어드는 등의 장점이 있는 반면 회복기간이 길거나 보행에는 지장이 없는지 등 단점도 잘 알아본 후에 수술 치료를 선택해야 도움이 되는 치료가 될 것입니다. ---p.226
회전근개 파열은 오십견과는 다른 병으로 알려져 있고, 대부분 어깨 통증의 제일 흔한 원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파열 여부를 확인하는 비싼 검사나 적극적인 수술 치료도 많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파열이라니?’ 하고 깜짝 놀라게 마련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파열되어서 수술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으면, 겁부터 먹고 당장에 수술을 받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의사의 말을 믿을 수밖
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릎 반월상연골판의 경우도 그렇지만, ‘파열’이라는 표현은 환자들을 우선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뭔가가 파열되어 있다는 설명을 듣고 침착하게 “아, 그래요.” 하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환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전근개 이상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멀쩡하게 있던 것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파열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퇴행성 변화처럼 부드러움이 없어지는 변화가 오랫동안 진행되는 노화현상이 어깨 관절 속 회전근개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회전근개가 파열된다기보다는 조금씩 탄력을 잃으면서 싱싱하게 매끈했던 회전근개의 부분들이 너덜너덜해져가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p.256
흔히 만성적으로 반복해서 팔이 저리면, 어떤 환자들은 뇌졸중이나 목 디스크 등을 떠올리며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허리 디스크 부분에서 살펴봤듯이 뇌나 척추신경 같은 중추신경에서 오는 원인들로는 만성적인 저림 같은 감각신경에만 국한하는 증세가 반복적으로 생기기 어렵습니다. 만약 중추신경에 이상이 있다면 운동신경 마비와 함께 감각이 없어지는 진짜 마비 증세는 올 수 있어도, 운동신경 마비는 없이 만성적으로 반복해서 저리기만 하는 감각신경만의 증세가 있기는 어렵습니다. 가끔 팔 저림 증세가 혈액순환 장애 때문이 아니냐고 문의하는 이들도 있는데, 혈액순환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p.266
또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100년 뒤에는 허리 디스크나 목 디스크 따위의 병명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미래의 사람들은 “100년 전에는 허리 디스크, 목 디스크라는 병명으로 척추 속에 있는 디스크를 꺼내는 수술을 유행처럼 했대.” 하고 믿기 어려워하고, 디스크만 아니라 어깨 관절의 회전근개나 무릎 관절의 반월상연골판에 대해서도 ‘파열’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적극적으로 유행처럼 수술 치료를 했다는 사실도 못 믿어할지 모릅니다.
노인성 골다공증, 류마티스 관절염, 척추관 협착증 등도 이미 사라진 병명이 되었거나 희귀한 질환으로 낯선 병명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들이 비슷한 진통제 성분만으로 여러 병을 치료하는 100년 전의 일률적인 처방전들은 이미 없어지고,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치료에 약이 무조건 기본으로 쓰이지 않는 미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한 도시가 아니라 동네마다 CT, MRI 촬영시설을 갖춘 병원들이 몇 군데씩 있었다는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논문을 쓰는 학생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