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자연현상이 아니며, 물리학적 현상은 더더욱 아니다. 경제는 사회현상이다.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되는 살아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경제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것은 ‘생명현상’이며 정신에 의해 지배되기에 경제학은 물리학이나 수학으로 환원되면 안 된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를 자원의 흐름과 그것들의 수학적 함수관계로 해석해온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사유습관에 대해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대신 경제학을 생명현상, 나아가 사람들의 관계로 해석하는 연구방법론을 제시한다.
---「Prologue」중에서
요즘 사람 중심 경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한 해 전 진보적인 유력 신문사가 ‘사람 중심 경제’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진보적인 국내외 학자들이라 경제에서 사람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당연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중심 경제학이 되려면 제대로 된 인문학과 결합되어야 하는데, 정작 이러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도 사람은 없다! 경제학자들은 경제이론은 물론 실천적 정책을 올바로 수립하기 위해 인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 없는 ‘사람 중심 경제’」중에서
개인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 중 많은 부분이 사회적 지식과 제도, 그리고 자연의 선물과 행운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것을 독점하며 지나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이미 정의롭지 못하다. 더욱이 그것을 빌미로 공동체의 의무마저 면제받고자 한다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의무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마땅히 져야 할 ‘의로운 책무’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책무의 부담 여부는 개인의 경제적 기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돈 잘 번다고 남편이 아내에 대한 도덕적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 되며,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면제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경제학으로 이해한 병역 ‘면탈’」중에서
인간은 이타적 본성과 함께 이기적 본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복잡한 존재다. 따라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산하는 것도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다. 나는 이윤추구가 다 ‘나쁜’ 경제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비효율적이거나 정의롭지 못한 방식, 즉 나쁜 방식이 있는 것처럼 효율적이거나 정의로운 방식, 곧 좋은 방식도 있다. 나는 이것이 경제학자 슘페터가 언급한 ‘혁신’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적어도 불의를 지양하고 혁신을 향할 때 그것이 좋은 경제에 기여할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의 새해」중에서
인간에게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일의 독식과 과로는 불행을 초래한다. 아무리 영양상태가 좋아져 팔팔해졌다지만 70세 노인에게 노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폐지까지 주워야 한다면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평생 수고한 자에게 놀이는 축복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일자리도 많지 않다. 때문에 일만큼 놀이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게 호모 파베르인 동시에 호모 루덴스인 인간의 본성에 맞다. 경제야, 우리도 이제 좀 놀자!
---「경제야, 우리도 좀 놀자!」중에서
제도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사유습관, 곧 문화, 그리고 그 나라의 정치권력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우리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포로가 된 나머지 보상이론이나 고용 있는 성장을 법칙으로 생각하는 사유습관에 젖어 아무런 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기술적 실업이나 고용 없는 성장은 불변의 법칙으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반대로 기술적 실업이나 고용 없는 성장을 불변의 법칙으로 수용하는 사유습관을 벗어나 고용 안전장치를 마련하면 기술적 실업은 더 이상 법칙이 아니게 된다. 그와 함께 오쿤의 법칙, 곧 고용 있는 성장 나아가 ‘고용 있는 기술진보’는 다시 법칙이 될 수도 있다. 인간사회, 그리고 시장에서 일정한 경향성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불변의 법칙은 없다. 경향성을 그대로 두어 불변의 법칙으로 숭배할 것인가, 새로운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둘 것인가?
---「오쿤의 법칙, 법칙은 없다」중에서
한줌 지배자에 의한 통계의 악용 사례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불리한 통계를 숨기고 발표를 미루거나 왜곡해 발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불행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통계를 불태울 수는 없다. 통계는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때 훌륭하게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종종 이론을 좋아하고 통계를 멀리한다. 이제 우리도 통계를 공부하자. 통계와 같은 관리 기술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킬지의 여부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부릅뜬 눈에 달려 있다.
---「진보와 통계」중에서
이제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좋은’ FTA를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좋은 FTA! 그것은 FTA를 기반으로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좋은 경제로 만들 의지를 우리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좋은 FTA는 시민들의 성찰과 국가의 제도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국가의 제도적 장치가 훼손될 때 그것은 나쁜 FTA로 진화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나쁜 삶을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FTA를 위하여!」중에서
공공재의 공급, 최저임금의 인상, 사회복지의 확충, 이 모든 것들을 자본의 논리에 기댈 수 없다. 좋은 사회를 희구한다면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불의한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연대, 인문학자들의 메시아적 외침, 그리고 지식인들의 양심선언, 시민단체들의 고발과 감시가 필요하다. 《자본론》은 물론이고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정치’ 경제학과 ‘사회’ 경제학, 나아가 인권과 민주주의, 정의, 공공선을 지향하는‘인문’경제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론》을 잠시 덮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