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해마다 여름이면 도쿄에서 특급 ‘아즈사’를 타고 찾아왔다. 어린 나에게 여름은 곧 릴리고, 릴리는 곧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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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이지 여관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침침하고 색 바랜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로비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고, 현관에는 투숙객이 외출할 때 신을 게다가 주르르 놓여 있고, 희미하게 먼지내가 났다. 복도를 뛰어갈 때마다 바닥이 삐걱거리던 게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등산객과 스키 타러 온 사람들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 한구석에 세 든 형태로 부모님과 쓰타코,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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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와 보내는 여름은 매 순간이 반짝임의 연속이고, 하루하루가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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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레라이스를 몇 번 더 먹었다. 그러면 여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릴리가 호타카에 온다는 것은 곧 릴리가 호타카를 떠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기쿠 할머니가 만들어 준 카레라이스에서는 여름의 끝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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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름만이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가을도, 겨울도, 봄도 아무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여름의 기억만이 태양처럼 환하고 선명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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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바다의 몸뚱이에 귀를 갖다 대고 지그시 눈을 감곤 했다. 그러고 있으면 정말 몸속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 같고 잔물결과 해변을 날아다니는 순백색 갈매기의 날개가 보이는 듯했다. 바다는 내게 무한대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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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살짝 젖은 릴리의 살갗에서 향긋한 태양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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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난 널 아주 좋아해. 네 생각을 하면 마음속에 단숨에 꽃밭이 펼쳐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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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내 모든 게 있는 거야.”
할머니는 밭일을 끝내면 언제나 당신 밭을 황홀한 얼굴로 둘러보며 말했다. 그곳에서는 꿀벌이 날아다니며 벌집을 만들고, 다람쥐와 산토끼가 놀러 오곤 했다. 박새도 둥지를 틀고 열심히 새끼를 길렀다. 밤이 되면 너구리와 멧돼지, 여우, 원숭이까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는 오는 이는 거절하지 않고 가는 이는 붙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밭은 마치 조그맣게 응축된 지구 그 자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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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나는 속으로 불렀다. 제발 지금까지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을 잊지 말아 줘. 나는 이제 외야석에서 네 활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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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는 밀월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을 나른한 공기만 고요히 흘렀다. 큰 의미에서는 여름의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 p.330
기쿠 할머니의 몸뚱이는 소멸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가 이 세상에 살았던 일, 가르쳐 준 것, 남긴 말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할머니의 몸이 투명해진 만큼 윤곽은 오히려 더 뚜렷해져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기쿠 할머니의 영혼은 나와 릴리가 분명히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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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구나. 릴리, 너랑 멀어지고 나서 그걸 잘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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