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잠시 빌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 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좇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 한다. (p 11-12시론 중에서)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구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속을 흐르고 싶다. (여름날 중에서)
--- p.25-26
내가 내일 죽게 된다면
편리한 교통과 우수한 약 아무 소용 없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돈이 없으면 죽기도 겁이 나
우선 직장에서 가불을 받고
점포마다 가득 쌓인 상품들과
고별하리라
밀린 세금을 걱정하며
나를 괴롭히던 관리들을 만나
오늘 죽지 않으려고 또 비굴한
미소를 보내리라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가
분명한 장래를 땀 흘려 약속하고
태어나지 못한 나의 자식들을 위하여
미사를 올리리라
나를 욕되게 할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고
죽은 나의 얼굴로 거미가 내려오지 않도록
방에는 살충제를 뿜어두고
목욕하리라
읽다 만 책은 마저 읽어치우고
라디오 시보에 정확한 시간을 맞추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길이 남을
유언을 생각하리라
혼자서 죽기는 아무래도 두려워
마지막으로 나를 지켜줄
오랫동안 내가 잊었던 가난한
친구를 불러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내일 죽게 도니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눈 덮이 산맥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그저 한마디 "장엄하다"고 말하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리라
--- pp.5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