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 ‘스카치 스타일(Scotch Style)’의 위스키를 만드는 나라는 일본뿐으로, 나는 그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최초로 영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다. 내 이력이라 봐야 이 정도뿐이지만, 겨우 이 정도를 지금까지 50년 이상 걸려서 해 오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만족’이라고 할 만한 곳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운명적이었던 위스키 인생」중에서
사케(日本酒) 양조장은 금녀의 구역이었으며, 술을 만드는 기간에는 일하는 사람 전부 금욕이 상식이었다. 술을 만들 때는 좋은 효모균을 키워내야 하고, 창고를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하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술이 맛없게 되면 계속 맛이 없게 되어버리니, 한번 시작하면 나쁜 버릇이라도 잘 고치지 않게 되어서 엄하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통해 알게 모르게 술을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내 피와 살이 된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술의 세계에서」중에서
이와이 씨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곧바로 아베 키헤이 사장님 방에 데려갔다. 나는 아베 사장님에게 12월에 군대 징병이 있을 것이고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등 모든 사정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아베 사장은 “내일부터 출근하라”며 입사를 허락했다. 아베 사장님은 본인의 청년 시절을 보는 것 같다며 내 엉뚱한 제안이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양주 제조에 발을 담그다」중에서
“타케츠루 군, 자네 스코틀랜드에 가서 몰트위스키를 공부하고 올 생각은 없는가? 우리 회사의 위스키가 지금은 팔리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가짜 위스키의 시대가 지속할 리는 없고 품질의 한계도 분명하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뜻이 있다면 위스키 본고장인 영국으로 유학 가서 그 기술을 배워 왔으면 좋겠어.”
갑자기 이런 제안을 받으니 선뜻 대답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벅차올랐다. 위스키 공부의 성지인 스코틀랜드로 유학 갈 수 있다는 기술자로서의 기쁨과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가 그 정도까지 신뢰받고 있었다는 인간으로서의 감동, 이 두 가지가 교차하면서 찌르는 듯한 감격이 덮친 것이다.
---「위스키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나다」중에서
위스키도 그렇지만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규모나 설비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숙성을 차분하게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정신이나 기질이 없으면 절대 좋은 술은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술 만드는 철학 중 하나인데, 그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캘리포니아 와이너리에서의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에서의 와인 공부 그리고 술의 철학」중에서
위스키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선 보리에 수분을 공급한다. 그러면 보리는 수분을 흡수하여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싹과 뿌리를 내면서 생생한 기운을 한껏 발산한다. 약 일주일이 지나면 건조탑 안에 들어가 발아를 멈추고 피트(이탄)의 열과 연기를 쐬게 된다. 피트의 연기는 바닥의 미세한 틈을 통해 보리 한 알 한 알에 스며들어 향을 남긴다. 보리는 피트의 향을 빨아들이고 위스키의 독특한 향을 만들게 된다. 피트로 충분히 건조시킨 보리는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을 붓고 잘 저어주면 디아스타제(Diastase) 작용에 의해 전분이 맥아당으로 변한다. 이것을 여과하고 식혀서 효모를 넣어주면 발효에 의해 달콤한 맥아당은 알코올이 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소박하지만 우아한 형태의 단식 증류기로 반복 증류를 하면 무색 투명한 스피릿이 된다. 이를 오크통에 담아 저장하면 그 사이에 깊은 맛과 색을 더하게 되고 위스키 스피릿이 된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에서의 실습」중에서
또한 증류를 마친 증류기 속에서 청소를 하는 것도 사람들 이 기피하는 작업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위스키를 만드는 방법을 몸에 익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라도 자진해서 맡아 했고 모든 일들이 새로웠다. 증류기 내부를 청소했던 경험은 일본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단식 증류기를 만들 때(오사카의 와타나베동제련소渡?銅工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밖에도 그랜트 씨의 체험 위주 교육 방침 덕분에 지금까지의 학문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경험과 감을 키우는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증류기를 때려서 그 소리로 증류의 상태나 진행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 등이었다. 배운 것, 본 것, 느낀 것, 그 어떤 것이라도 그날 바로 노트에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 노트는 내가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교토의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노트에 위스키 만들기를 담다」중에서
실습 3주째 되던 어느 날, 증류 주임이었던 할아버지가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너 조작해 보고 싶은 것이로구나. 모레부터 내가 야근하니까 밤에 나와라. 알려줄테니”라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그날 밤에 가 보니, 3층으로 날 데려가 손으로 직접 밸브를 조작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그 외에도 원료에 관한 것이라든가 조작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이분한테 배운 것이 매우 많았다. 그레인위스키에 관해서는 문자 그대로 야학을 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니시미야西宮에 니카 그레인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밸브를 연 사람이 나였다. 그때 당시의 일이 생각나서 감개무량했다.
다.
---「블렌더가 되기 위한 특훈」중에서
위 내 머리 속에는 진짜 위스키를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 가짜 위스키라면 내가 월급을 많이 받으며 있지 않아도 다른 직원이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셋츠주조가 진짜 위스키를 만들지 않는다면 내가 회사에 남아 많은 돈을 받고 있을 의미가 전혀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님의 배려에 만족하며 회사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충분히 고민한 끝에 아베 사장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더듬더듬 고했 다. “잠시 동안 쉬고 싶으니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것은 귀국 이듬해, 1922년의 일이었다.
아베 사장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아쉽게 됐구만.”
작은 소리 하나를 내뱉을 뿐이었다.
---「위스키 제조 계획이 반려되다」중에서
위스키 증류소 건설에 적합한 장소의 조건은 여러 가지다. 공기가 맑아야 하고, 근처에 강이 있어야 하며, 여름에도 온도가 별로 상승하지 않아야 하고, 피트 지대가 있어야 한다. 오사카 근처로 지역을 한정하여 조건에 가장 적합한 곳을 지도에서 찾았다. 그리고 괜찮다 싶은 곳을 직접 찾아갔다. 오사카뿐만 아니라 타카라즈카, 키슈, 시가, 마이코까지도 찾아갔다. 그 결과, 오사카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지금의 산토리 증류소가 있는 야마자키였다.
---「물 맑은 땅 야마자키를 찾다」중에서
이제 슬슬 마흔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독립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토리이 씨와는 싸우지 않고 원만하게 퇴사했다. 처음부터 계약은 10년이었고, 나도 평소에 자신의 위스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약 기간이 다 되었을 무렵, 1932년에 퇴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했지만 보류되고 있었다. 어쨌든 사케 보호 시대에 토리이 씨가 없었더라면 민간의 힘으로는 절대 위스키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토리이 씨가 없었더라면 내 위스키 인생도 없었을 것이다.
---「독립을 위해 퇴사를 결심하다, 123쪽
가짜 위스키는 위스키가 아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생활 문제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 원주만 만드는 증류소는 위스키 원주만 만들었고 그 원주를 팔아서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증류소처럼 다른 위스키 회사에 몰트위스키 원주를 판매해 보기로 했다. 가짜 위스키에 몰트위스키를 조금만 넣어도 맛이 꽤 좋아진다. 그렇게 하면 위스키 품질도 좋아지니 내 이상에 조금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원주는 잘 팔렸고 전국에 있는 약 30개의 위스키 제조 회사에서 잇따라 요청이 들어왔다. 1949년 즈음의 일이다.
---「가짜 위스키 시대의 고뇌」중에서
니카 위스키도 이런 흐름 속에서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니카 위스키는 한 병의 용량도 적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이다. 이에 니카도 타사와 같은 용량, 같은 가격의 위스키를 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주위로부터 들려왔다. 그래서 둥근 병의 통칭 ‘니키(ニッキ?)’를 출시했다.
당시 니카 위스키는 홋카이도에서 60%, 다른 지역에서 40%의 비율로 판매되었다. 이것이 둥근 병 니키 위스키의 판매로 단숨에 역전되어 전국적인 상품 반열에 올랐다. 당시 영업 담당이었던 이야다니 사장에 따르면 500밀리미터 350엔에 팔던 것을 타사와 같이 640밀리미터 330엔에 판매하니 한 병 당 30%의 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87% 성장하면 이 적자는 흑자로 전환된다. 어떻게든 한 번은 이 ‘데드 포인트’를 넘어서지 않으면 위스키 시장을 적극적으로 가져갈 수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방면으로 검토를 거듭하고 결정했다. 그리고 1956년 11월 둥근 병의 니키 위스키를 출시했다. 다행히도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1954년(생산년도)의 위스키 판매 금액을 100으로 본다면, 1959년은 334가 되어 니카 위스키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둥근 병 위스키로 경영난을 돌파하다」중에서
화이트 베어는 이미 사용했고, 노스랜드는 삼십 몇 년 동안 간직하다가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처음 이 이름을 생각했을 때는 하이랜드 스타일의 몰트위스키 증류소, 로우랜드 스타일의 몰트위스키 증류소, 게다가 코페이 그레인 몰트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를 갖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할 수 없었다. 자금 문제뿐만 아니라 한정된 남은 인생을 봤을 때도 완전 꿈 같은 일이었다. 삼백수십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이 세 종류의 위스키 증류소를 만든 사람은 물론이고 기업도 없었다. 다행히도 운 좋게 명이 길어 이 숙원 사업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위스키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지금에서야 만끽하고 있다
---「품질 경쟁의 시대」중에서
위스키라는, 과학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법과도 같은 매력에 빠져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능력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세상의 학문도 기술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약 반세기 전에 배운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위스키의 세계이다. 위스키 숙성을 과학의 힘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있다. 자연과 시간만이 오직 답인 것이다. 또, 스코틀랜드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제조법이 지금도 가장 좋은 위스키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위스키에 사로잡힌 인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