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의 이치를 통해, 노자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충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국가의 경영에 뜻을 둔 위정자를 말한다.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위정자는 무사無事 즉 일삼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사’는 앞서 언급된 ‘무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심을 비우고 또 비워 마음을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이른 상태에서 행위 하는 것이 무위였듯이, ‘무사無事한다’는 것은 국가를 경영할 때 위정자의 욕심을 비워내는 것을 말한다. ‘내 임기 중에는 반드시 이러이러한 일을 해내야겠다’, ‘나는 후세에 길이 기억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식의 아집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위정자로서 또는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는 공적을 남기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그런 강박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다 보면 그런 생각 때문에 오히려 국가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라는 거대 집단은 하나의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물을 잘 기르고 이끌려면 그 생물 자체의 욕구와 내재 원리에 따라 그것에 합당한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위정자 개인의 공명심 또는 무리한 정치적 야심에 사로잡힌 채 국가 경영에 임하다 보면 국가를 위한다는 행위가 오히려 국가를 망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천하는 신묘한 것이니 억지로 도모할 수 없다. 인위로 행하는 자는 망치고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친다.”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중에서
‘수중守中’을 말한다. 여기서의 ‘중中’은 앞서 언급된 천지 및 풀무와 연결된다. 앞서 천지 사이가 텅 비어 있으므로 온갖 사물들이 생겨나올 수 있고, 풀무가 비어 있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모습을 본받아 인간 특히 국가 경영을 맡은 위정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고요히 내면의 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이 ‘허虛’이기에 인간 특히 세상을 다스리는 위정자는 ‘빔’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온갖 잡다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가득 차 있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다 보면 자연히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노자는 ‘수중守中’ 즉 내면을 텅 비우라고 충고한다.
요컨대, 이 장에서는 ‘허虛’ 즉 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꽃에서 ‘허공’을 보았듯이) 천지자연이 무심할 수 있는 것은 빔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빔을 유지하면 그 작용이 무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 역시 이러한 천지자연을 본받아 ‘수중守中’할 때 무궁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천지는 빔(虛)을 바탕으로 삼는다」중에서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다. 사람들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쳐다보지만 노자는 텅 빈 계곡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산 정상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갈 때 노자는 계곡의 시원한 그늘에서 한가로이 노닌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서 호들갑을 떨며 “야호! 야호!” 하고 외칠 때 노자는 계곡의 자궁에 들어앉아 조용히 침묵으로 응답한다.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무수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파여 있는 깊은 계곡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계곡들이 짙은 그늘을 머금은 채 깊이 파이면 파일수록 봉우리들은 더욱더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머리를 쳐든 채 우뚝우뚝 불끈불끈 힘자랑 한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침묵하는 계곡들이 엎드려 있다. 그늘에 파묻힌 계곡은 자신을 텅 비운 채 천만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자세로 낮게 낮게 머물러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은 더욱더 낮아지고 깊이 패여 간다. 그늘 속에서 낮음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계곡의 미덕이다. 노자는 이러한 계곡의 미덕을 통해 도의 오묘한 모습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중에서
‘정靜’은 바로 통치자가 지녀야 할 핵심 덕목이었다. 왜냐하면 황로학에서 “군주의 도는 무위하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유위有爲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때 무위와 유위는 각각 ‘정靜’과 ‘동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군주는 ‘정’을 통해 ‘동’을 행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인재 활용론과 연결된다. 거대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 통치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없다. 때문에 훌륭한 통치자는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에 맞는 실무를 맡긴다. 따라서 이때 통치자가 하는 일뫀 단지 깊은 궁궐에 고요히 머물면서 적재적소에 합당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군주가 인재들을 적절히 등용하고 활용하면 군주 자신은 몸소 행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이런 게 바로 황로학에서 말하는 무위정치이다.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중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사회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소박한 원시공동체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혹은 ‘시대에 역행하고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몽상에 불과하다’ 등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노자’가 정말로 이러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았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여기에 담긴 의미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로, 수많은 겸병전쟁을 통해 많은 ‘소국과민’의 작은 제후국들이 몇몇 ‘대국중민大國衆民’의 대국 속으로 하나씩 둘씩 통합되어 가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겸병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바로 일반 백성이었다. 백성은 그들끼리 서로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원수진 일도 없었고 또한 서로를 죽여서 얻는 이익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몇몇 위정자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서로 싸우며 죽이고 죽는 고통과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 노자는 당시의 모든 혼란상과 문제점이 바로 거대 제후국들이 추구하는 ‘대국중민’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19세기 일부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 정책에 의해 다수의 약소국들이 침략당하고 고통 받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역으로 ‘소국과민’을 제창하였을 것이다. ‘소국과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소박한 삶에 지극히 만족하기 때문에 굳이 밖으로 나돌아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니 배나 수레와 같은 편리한 도구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국가의 규모를 작게 하고 국민의 수를 적게 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