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 페트렌코는 신장 172센티미터에 메뚜기처럼 길고 날렵한 다리, 백조처럼 긴 목의 소유자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한 스타 무용수들 가운데 하나였다. 1969년 마르세유 출생이고, 그녀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텔라 페트렌코는 열두 살에 파리 오페라 부속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에 왔다. 스텔라는 성공에 대한 일념을 바탕으로 한 계단씩 목표를 향해 올라갔고, 열일곱 살에 파리 발레단에 입단했다. 그 후 카드리유, 코리페, 쉬제의 단계를 거치며 상승 곡선을 이어갔다. 스물두 살에 프르미에 당쇠르가 되었고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일인이역인 오데트와 오딜 역을 연기해 극찬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바로 그해에 파리 시내에서 오토바이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고, 등과 무릎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오랜 기간 재활 치료를 하느라 스텔라의 발레리나 경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스텔라는 등과 무릎의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스텔라는 치명적인 운명의 장난에도 굴하지 않고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 살에 에투알 무용수로 등극했다.
--- pp.32~33
마티아스는 유튜브를 통해 스텔라가 공연한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이라이트로 보았다. 불과 몇 장면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인상적인 무대였다. 스텔라는 도자기 같은 하얀 피부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발레리나의 상투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얼굴만 보아서는 우크라이나 출신인지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우아한 구석이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근육질 체구에 하루 여덟 시간씩 맹훈련을 해 다져진 긴 다리, 뼈처럼 보이는 두 팔, 각진 얼굴, 움푹 파인 두 볼, 왠지 심란한 느낌을 풍기는 눈, 뒤로 틀어 올린 머리에서 한두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 그 어디에서도 우아한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스텔라가 춤을 추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 무슨 연금술인지, 스텔라는 무대에서 춤을 추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 독특하고 매력적인 여성,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오라를 풍기는 여성으로 변모했다. 마티아스는 발레를 보는 동안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스텔라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치 해묵은 아르마냑에서 증발한 알코올 기운 때문에 취기를 느끼듯이.
--- p.34
“엄마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셨어요?”
마티아스는 커다란 냄비에서 물이 끓는 동안 인덕션 근처에 음식 재료들을 모두 모아두었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 꼼꼼하게 읽어보았고, 그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여자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봤어.”
“어떤 결론을 얻었는데요?”
마티아스는 계란 세 개를 깨 노른자만 대접에 담고 나서 파르메산 치즈를 첨가해 휘저었다
“넌 왜 네 엄마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하지?”
“어떤 논리적 근거가 있지는 않아요. 그냥 직관이죠.”
마티아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직관은 믿을 게 못 돼.”
“엄마를 가장 잘 아는 딸의 직관이라면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엄마의 혈액에서 알코올 1그램이 검출되었고, 발코니에서 대마초를 재배했어.”
“그런데요?”
“네 엄마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래서요?”
“네 엄마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루이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 pp.55~56
그나마 가장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는 DPJ 3팀 형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실족사였다. 술에 취한 스텔라가 화분에 물을 주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추락했다고 보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마티아스가 그런 생각을 말하자 루이즈가 고개를 저으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때 갑자기 마티아스의 얼굴에 강력한 빛이 반사되었다. 방금 전 누군가 길 건너편 건물에서 창을 열거나 닫았고, 거울처럼 빛을 반사한 것이다.
마티아스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길 건너편 건물들로 눈길을 던졌다. 서로 마주보고 선 7층의 흰색 건물 세 채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발레리나의 죽음과 관련해 갖가지 증언은 많았지만 솔깃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티아스는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을 반쯤 열어둔 상태로 집 안으로 들어와 욕실로 갔다. 사소한 단서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구급상자를 열어보니 여러 개의 콘돔, 벤조디아제핀, 설트랄린이 눈에 띄었다. 당연하지만 무대 뒤편은 언제나 공연장보다 덜 근사하기 마련이었다.
--- p.66
선명한 두 개의 줄이 나를 비웃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 짐작했다. 생리가 지연되고, 가슴께가 단단해지고, 가끔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임신 테스터를 세면대에 던져버리고 샤워꼭지 아래에 섰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아이 아빠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더듬어보았다. 머릿속에서 역순으로 지난 날을 떠올려보던 나는 코랑탱 르리에브르 기자에게 주목했다. 8월 초에 틴더를 통해 그를 만나 처음 데이트를 했다. 기분이 어찌나 별로였는지 벌써 기억에서 일부가 사라져버렸다. 코랑탱은 기사를 써서 여러 매체에 파는 프리랜서 기자였다. 그는 활동가 기자를 자처하면서 적극적 행동주의와 언론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작자였다. 그 작자는 가스통 라가프 식 동글동글한 얼굴에 염소수염이 있고, 탈모 증상이 있어 늘 커다란 챙이 달린 비니를 쓰고 다녔다. 그가 프로필에 올린 사진과 실제 얼굴은 전혀 달랐다.
코랑탱은 나를 제마프 기슭에 있는 앙팡 테리블 바로 데려갔다. 그는 ‘행복한 지구가 필요해.’라는 표어가 그려진 우스꽝스런 티셔츠 차림이었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가 쉴 새 없이 자기 말만 해대는 바람에 15분쯤 듣다가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레몬 드롭 잔을 연신 비웠다. 그 결과 내 주량을 넘겨 과음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위젠바를랭 가에 위치한 코랑탱의 아파트까지 따라갈 리 없었으니까.
--- pp.103~104
“조심해요, 위험하니까!” 스텔라가 외친다. 스텔라의 목소리가 지붕 바깥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들린다. 나는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고,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붕 위에서 보는 전망이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검은 점판암들과 아연 조각들이 넘실거리는 현기증 나는 바다. 나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어대는지 눈에 익은 지표들을 찾고 방향을 잡기까지 제법 애를 먹는다. 아연 지붕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차양을 만든 다음에야 집으로 통하는 창문의 위치를 확인한다. 조심조심 홈통을 따라 내려가다가 갑자기 불어온 돌풍 때문에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른 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소리 내어 웃는다. 나는 이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순간들, 오늘 하루는 다른 날들과 달랐다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들을 사랑한다.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닫이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다. 이제 몇 미터만 더 가면 된다. 나는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어간다.
--- p.110
‘성공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는 것일까?’라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생의 톱니바퀴에 나를 제대로 끼워 맞추지 못하며 살아왔다. 나는 늘 나의 삶에서 저만치 비켜서서 허우적대다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내가 아니다.
약간 정신이 나간 여자.
나를 가리키는 이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들이 있다.
안젤리크, 넌 약간 정신이 나갔어.
엄마는 자주 그렇게 말한다. 한때 내 친구였던 여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내 인생에 잠시 끼어들었던 남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넌 약간 정신이 나갔어.
바리케이드 반대편에서는 삶이 다른 밀도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다니? 인생의 소금이 되어주는 삶의 작은 행복들을 믿지 않다니? 새로운 삶이 가능할 거라 믿으면서 도망치기를 바라다니? 항상 ‘무심한 지혜보다 광적인 열정’을 선호하다니? 게임이나 하고, 가끔 포르노 영상이나 보는 주제에 시큰둥하게 작업을 걸어오는 저비용 남자들보다 나은 남자들을 원하다니? 그런 말끝에 항상 ‘넌 약간 정신이 나갔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 pp.12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