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화병원의 지상과 지하는 양지와 음지였다. 흔히 병원을 사람 살리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제로섬 게임이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때로는 한 사람의 희생이 여럿을 살리기도 했다. 지상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지만, 지하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지상의 일을 알고 있었다. 영업비밀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막대한 부를 가진 자들이 소개받고 오는 곳으로 은밀하게 운영되어야 했다. --- p.17
광철은 증명사진을 자세히 봤다. 긴장한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얇게 쌍꺼풀 진 눈에 갸름한 얼굴,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민호는 눈에 띄는 화려한 미남이었다.
“선녀와 나무꾼 알지? 쟤한테는 의사면허가 선녀 옷이야. 남자놈이라 아이를 셋 낳게 할 순 없으니까, 빚이라도 만들어서 못 가게 만들어야지.” 도현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소파에 기댔다. 그의 얼굴에는 타인의 인생을 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는 엿볼 수 없었다. 광철은 민호에게 연민을 느꼈다. 미인은 박명이라더니 미남은 박복했다. 광철은 민호의 증명사진을 지갑 속에 집어넣었다. --- p.46
상체를 고정시키던 자헌은 무심코 여성의 얼굴을 봤다가 흠칫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 하얗고 결 좋은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모난데 없이 작고 갸름한 달갈형 얼굴에 입술은 붉고 도톰했다. 자헌은 해야 할 일을 잊고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봤다.
“뭐해?” 계춘이 여성의 오른쪽 팔뚝을 압박고무줄로 묶으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자헌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갔다. “미친, 엄청 예쁘네.” 얼굴을 확인한 계춘이 스텐밧드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자헌은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이상형이었다. 그런 여자를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 pp.62-63
“걱정하지 마. 네가 곤란하지 않게 정리할 테니까.”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나는 진짜로 널 도와줄 마음이 있다니까? 너도 알 거 아냐.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목을 매는지. 나 이용하는 거라도 상관없어. 아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용해. 내뺄 생각하지 말고 나와 일하자니까.” 민호는 속이 뜨끔했다. 의사면허만 재발급되면 그만둘 거라는 걸 도현이 알고 있었다. 무서운 일을 하는 놈이니 나가지 말라고 협박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회유할 줄 몰랐다. “마음 좀 추스르고 내려와.” 도현이 옥상 문을 열고 나갔다. 민호는 닫힌 문을 한참 쳐다봤다. 인간이란 참 유치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편 좀 들어줬다고, 처음으로 도현이 가깝게 느껴졌다. --- p.96
“바디바바디바 O형을 구해달래요.” “바디바... 뭐요?” 도현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럴 만했다. 평생 바디바바디바라는 혈액형이 존재한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바디바바디바 O형이요. 처음 들어보시죠? 아주 희귀한 혈액형이에요. 30만분에 1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해요. 국내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열 명 내외라고 하고요.” 심장, 간, 각막 등 다양한 장기를 매매했지만 희귀혈액형을 구해달라는 의뢰는 처음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혈액형 검사를 할 수도 없으니, 까다롭고 어려운 의뢰였다. --- pp.116-117
혜영은 회사 건물을 나서며 목에 걸린 사원증을 벗어 핸드백에 넣었다. 마침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중요한 거래처에서 온 연락일까 봐 곧바로 확인했다.
web 발신 ★바디바바디바 O형★ 수혈용 혈액 [전혈] 필요한 응급환자 발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참여 가능하시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헌혈센터에서 온 문자였다. 희귀혈액형 바디바바디바 O형인 혜영은 고등학생 때 처음 헌혈을 한 이후로 헌혈기관의 메시지를 자주 받았다. 여자는 철분이 부족해 헌혈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히 혜영은 철분 수치가 높아 꼬박꼬박 헌혈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