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江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김연창(金演昌)이며, 어머니는 박세창(朴世昌)으로 2남 1녀 중 장남이다. 3세 때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서 성장하였다.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東光學校 :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 · 박태원(朴泰遠) · 김기림(金起林) · 윤태영(尹泰榮) · 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그 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 「파편의 경치」 · 「▽의 유희」 · 「공복」 ·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 「꽃나무」 · 「이런 시(詩)」 · 「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 · 「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