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공자 : 올바른 국가경영의 방략
1. 시작하는 말
춘추전국시대는 흔히들 백가쟁명의 시기라고 말한다.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그 영향력이 지대했던 철학사상이 모두 이 시기에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철학사상들이 출현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는 당시의 중국 사회가 매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당시의 여러 사상 유파는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제 각기 다른 해결방안과 반응을 내놓는다. 이처럼 여러 학파가 당시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게 된 데에는 각국 제후들의 정치적?군사적 요구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각국 제후들에게는 동일한 이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나라 왕실을 계승하여 천하를 하나로 평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백가는 어떻게 하면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수많은 나라로 갈라져 분쟁을 일삼는 혼란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할 것인가의 문제와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후에 어떠한 방식으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킬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각자의 주장과 방안을 내놓는다.
춘추시대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겸병전쟁이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기로 당시의 통치자들은 겸병전쟁에 의해서 늘어난 백성들을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취급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바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전제로서 부국강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인구가 많을수록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소국가의 통치자들은 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반드시 많은 수의 백성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주 유용한 자원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과 기타의 자원들은 서로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타의 자원은 만일 쓰임이 잘못 될 경우에 그것이 소진되거나 낭비될 뿐인 반면 백성들과 같은 경우는 만일 잘못 통치하게 된다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확연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중국 사회는 봉건체제의 소규모 성읍국가 시스템에서 영토국가 체제로 옮겨가는 격변의 시기로 인구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인구문제는 춘추시기에 중국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였으며, 대부분의 제자백가의 사상 역시 모두 이러한 문제의 해결방안 모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또한 당시의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악제도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상공업 역시 매우 번성한 국가 가운데의 하나였다. 제나라의 관중에 의해서 실시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의 여파는 노나라에까지 미쳐서 노나라는 경제적인 이익과 상공업 분야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된다.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노나라는 군소 귀족들의 토지점유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농민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공자는 ‘예禮’로써 경제 분야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상과 같은 공자의 경세사상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경영관리론과 생산론 및 분배와 소비?상품 유통론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겠다.
2. 경영관리론
공자는 군자라고 하는 존재는 의로움에 밝다고 하여 재화를 우선순위에서 다음으로 미루고, 소인은 이익에 밝아서 재화를 우선순위에서 제일 앞에 둔다고 하였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사회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절대다수가 소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주장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역시 재화를 우선순위의 수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공자는 전체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하는 부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이 번성하구나!” 염유가 여쭈었다. “백성이 번성한 다음에는 또 무엇을 더하여야 되겠습니까?” “그들을 부유하게 해줘야지.” “부유하게 된 다음에는 또 무엇을 더하여야 되겠습니까?” “그들을 가르쳐야지.”
위의 인용문에서 “백성이 번성하구나!”라는 말은 위나라의 인구가 매우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구가 번성하게 된 뒤에 제일 급선무로 해야 하는 조처가 바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부유하게 만든 뒤에야 비로소 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공자가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문제가 백성들의 재화를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점을 긍정한 것은 분명하다. 당경증(唐慶增)과 같은 경우도 “백성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하는 이론은 공자 경제학설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유가의 주장 가운데 가장 큰 특색이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재화는 서주시대 이래로 전통적으로 중시했던 백성들의 생존에 가장 절실한 곡식 특히 오곡五穀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가 말했다. “먹을 것을 풍족케 하고, 군비를 충분히 하고,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부득이하게 꼭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리시겠습니까?” “군비를 버려야지.” 자공이 물었다. “부득이하게 꼭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리시겠습니까?” “먹을 것을 버려야지. 옛날부터 누구에게나 죽음은 있었던 것이나, 백성들의 믿음이 없다면 나라는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들의 식량을 풍족케 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식량이 지속적으로 풍족하게 될 수 있는 근본 토대를 갖추는 것에 있는 것이다. 즉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게 되면 증산된 생산물을 통하여 군비를 충실하게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 외에도 군비를 충실히 하라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이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바로 군비를 가장 먼저 포기하라고 한 것이다. 백성들의 식량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식량은 경제에 관련된 문제이고 군비는 국방에 관련된 문제로서 이들 가운데 공자는 경제를 우선시 했던 것이다. 경제와 국방은 백성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수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는 백성들의 신뢰는 식량이 풍부하고 군비가 충실해진 결과로 얻어진다고 했던 것이다. 공자는 통치자가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성들의 식량을 풍족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으며, 백성들이 풍부한 재화를 소유할 수 있게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백성들의 재화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매우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윤리적 표준과 평행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