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그뿐. 바로 그것이 ‘독학’이다. 왜 우리는 스스로 공부를 시작하고 계획대로 잘 굴러가지 않아 좌절하고,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는 걸까? ‘그런데도 다시 시작하는’ 바로 이 지점에 공부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열쇠가 있다.
공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여도 내가 몰두했던 기억이나 공부를 시작한 계기를 되짚어보자. 콕 짚어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 부분을 찾아보는 것이다.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도 왜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걸까? 좌절하거나 중단해도 다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속하는 것일까?
--- p.36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세우고, 실패의 결과가 본래 내가 해야만 했던 공부나 과제의 수행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계획 실패’라는 재능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인데, 실패했을 때 본래 의도했던 목표가 달성되도록 실천 계획을 설계하는 게 핵심이다.
인간은 하늘이 내린 사악한 생물이다. ‘하라’고 명령하면 의지를 잃고 ‘하지 말라’고 금지하면 오히려 하고 싶어진다. 인간은 원래 역설적인 존재이며 역설 플래닝 역시 악질적인 농담처럼 느껴지지만, 인간의 이 사악한 본성을 이용한 것이다. 이 방법은 이론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 임상 처방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확대하는 경우에 쓰이는 역설적 개입의 대표적 방법이다. 이는 문제(증상)를 일부러 발생시키도록 지시하는(처방하는) 방법으로, 예를 들면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 “좀 더 손을 흔들어보세요” 하고 권하는 경우다.
--- p.87
인간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해 위기를 극복한 인물로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있다. 그는 파국적인 결말로 이어질 뻔한 의식의 변화를 물리적 속박으로 극복했다. 반면 우리는 저마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사회적 동물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양한 사회적 규제가 이미 행동이나 사고, 판단 등에 영향을 미치고 제약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 때문에 배움을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학을 위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가 사회적인 ‘오디세우스의 밧줄’을 설계할 차례다. 이 밧줄은 변덕이 심한 인간의 의지에서 ‘외장형 이성’이 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소개한 게이트 키퍼 또한 외장형 이성이 될 수 있다.
--- p.114
우리의 배움과 지식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된다. 홀로 품고 있던 막연한 의문, 아직 의문이라는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한 위화감에 일부라도 형태를 부여하고 배움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라면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질문은 이미 보유한 지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시점에 탄생한다. 아무것도 모르면 질문을 던지기 위한 밑거름이 없다. 그렇다고 이미 아는 것에서만 멈춘다면 다음 배움으로 넘어갈 질문을 얻지 못한다.
인간은 지와 무지(미지)의 경계에서 의문을 얻는다. 고대에서 변론술을 훈련하는 과정 중에는 주제에 관해 일련의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방법이 있었다. 이 일련의 질문은 앞으로 논하려는 논의의 재료를 넣어 정리하는 ‘틀’의 구실을 한다. 고대 변론술에서는 이 틀을 ‘토포스topos’라 일컬었다..
--- p.147
눈에 들어온 한 권, 가령 누군가가 추천한 책만 읽는 식의 고립된 독서를 ‘점의 독서’라고 한다. 지식이 그렇듯, 온갖 서적이나 문헌 또한 홀로서기를 통해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한 권의 책, 하나의 문헌은 다른 많은 문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서로 참조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 연결을 따라가는 독서를 ‘선의 독서’라고 한다. 또한 문헌끼리 연결을 기다리지 않고, 혹은 연결을 거스르며 문헌과 문헌을 대조하고 비틀어가면서 저자도 예기치 못한 선(연결)을 여러 곳에 창출하고 땋아가는 독서를 ‘면의 독서’라 한다.
서평이나 독서 안내, 홍보나 입소문을 통해 가 닿는 한 권이라는 단위는 서적 유통의 단위지, 인간의 지적 활동의 단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알고 싶을 때 이것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식의 딱 들어맞는 한 권이 존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 p.230-231
역독은 ‘문법 번역식 교수법’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어학 교육에 이용되었으나, 낡은 방식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소통의 중요성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문법을 의식하며 말하는 원어민은 없다’, ‘문법 위주로 가르치니 아이들이 영어 말하기를 못한다’라며 특히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을 계기로 정치가가 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수상으로서 영국을 이끌고, 후에 이를 회상하는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윈스턴 처칠의 견해는 달랐다
--- p.337
독학을 포기하는 것도 지속하는 것도,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도 모두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독학의 모든 장단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배움은 결국 자신을 바꾸는 일이다. 어제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면,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사람은 변모한다. 그리고 자신이 달라지면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던 방식이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성과도 나오기 전에 효과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여러 방법에 손을 대면 배가 산으로 갈 것이다.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고 효과를 측정하면서 필요하다면 방법을 바꾸어가면서 모든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게 독학자다.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여 실행한 것이니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사실 실패해도 크게 잃는 건 없다. 깊이 생각해서 시도하되, 실패하면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많은 독학은 좌절한다. 안심해도 좋다. 독학이 실패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독학은 자기 의지의 하나로 시작할 수있다. 몇 번을 좌절해도 하고 싶으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 p.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