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체포된 보성사 직원 인종익은 경찰이 “대체 왜 이러한 무모한 일을 시도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전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때가 왔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시도를 한 것뿐이다. 처음부터 성공을 기대하고 벌인 일도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좌절하면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100명을 죽이면 또 다른 100명이 나올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한번 터진 물길은 계속해서 흘러넘칠 것이다.” --- p.23
이처럼 3·1운동을 준비한 이들 대부분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 곧바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1919년 봄의 시점에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지라도, 비록 자신들이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훗날 독립이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장면은 바로 그렇게 온몸을 던져 희망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 p.52~53
양전백을 만난 뒤, 선우혁은 자기 고향인 정주로 가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기독교 장로이기도 한 이승훈을 만난다. 그는 선우혁이 만나려 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우혁의 고향 선배이자 105인 사건으로 같이 옥고를 치른 동지이기도 했다. 선우혁은 양전백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는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세계에 보여주는 큰 시위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나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소. 이제야 민족의 살길이 생겼구려.” 이승훈은 선우혁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마침 오산학교 교사들의 봉급을 주기 위해 자신의 친형이 전답 25마지기를 팔아 마련해둔 돈 5,000원을 선뜻 그에게 내준다. (……)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은 “우리는 105인 사건 때 한 차례씩 죽었다가 살아나온 목숨이므로, 그때 죽은 셈치고 다시 나라를 위해 일하자”라고 서로 맹세했다고 한다. --- p.109~111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보성사판’과 함께 국가지정기록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신문관판은 보성사판과 활자가 전혀 다르다. 또 신문관판은 띄어쓰기도 되어 있고, 현대 문법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 보성사판에서 ‘업도다’라고 한 것을 ‘없도다’, ‘업스니’라고 한 것을 ‘없으니’ 등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9년 1월 1일 자에 최남선이 쓴 글을 보면, 독립선언서에서 쓴 표현과 동일한 ‘업슴’ 등의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현대 문법에 맞게 쓴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아마도 신문관판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 누군가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고, 맞춤법에 맞춰 다시 조판해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p.169~170
당시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의견서와 독립청원서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19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온몸이 마비되는 상황에서도 병보석은 줄곧 기각됐고, 1920년 10월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출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1922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고 만다. 양한묵은 투옥된 지 3달이 안 된 5월 26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않았지만 도쿄에 가서 경시총감과 만난 뒤 체포된 안세환은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앓다가 죽었다. (……) 여러 고초를 겪고도 살아남은 민족대표는 대부분 계속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거나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 p.193~194
덕수궁에 돌입한 시위대에 있었던 유진혁에 따르면, 당시 세브란스의전 학생 1명이 앞장서고 200여 명의 군중이 그의 뒤를 따라 경찰 및 이왕직의 보병대와 육박전을 벌인 끝에 안으로 돌입했다. 그런데 덕수궁에 들어간 그들은 그곳의 너무나 호화로운 별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왕세자 이은을 면회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땅 위에서 똑같이 망국을 맞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처지였지만, 이왕가와 일반 민중이 처한 삶과 입장은 이렇게 달랐다. --- p.207
헌병대에 이르렀을 때, 군중의 수는 1,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이들은 연이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서봉화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아, 내 나라를 내놓아라!” 이에 헌병분대장은 태극기를 든 그의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다. 격노한 서봉화가 가슴을 헤치고 “찌를 테면 찔러 보아라”라고 외치자, 이번에는 군도가 서봉화의 배를 찔렀다. 서봉화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숨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군중은 분에 못 이겨 헌병분대로 습격해 쳐들어갔다. 헌병들은 마구 총을 쏘았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다음 날, 전날의 참극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p.217
유럽에서도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2월의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그해 10월의 오스트리아 연방헌법부터다. 1919년 8월 11일에 공포된 바이마르 헌법조차 “독일제국은 공화국이다”라고만 했을 뿐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도 선구적인 것이다. --- p.332
3·1운동 이후 여러 정부안이 나올 때마다 왜 멀리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집정관 총재나 국무총리 등으로 자주 거론된 걸까? (……) 그는 『황성신문』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데, 이후 미국에 가서 불과 5~6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친다.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교 같은 미국 명문대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한,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된 것이다. (……) 당대 한국인으로서 가장 지적 수준이 높고 성공한 사람, 거기다 독립협회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문명개화에 매진하는 인물 등으로 소개됐다.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문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개인의 성품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1919년 12월까지 상하이에 오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다. 또한 상하이에 도착한 뒤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1920년 6월 다시 자신의 활동지인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 p.327~328.
서울에서 수백 킬로미터 기차를 타고 가서, 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들, 장날의 만세시위에 쓰기 위해 어두운 골방에서 수백 장의 태극기를 그리고 또 그린 사람들, 격문을 등사하지 못해 먹지 몇 장을 놓고 골필로 눌러쓴 사람들, 장터까지 태극기와 선언서를 몰래 운반해온 사람들,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렬을 이끈 사람들, 그리고 결국 군경의 총칼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은 1919년의 3~4월을 찬란한 봄으로 만든 영웅들입니다. 이 책은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