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억울함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몸과 아픔이 납작해지는 것을 구해내려는 시도에서였다. 원인 모를 만성질환이 나의 감정, 연애 관계, 노동, 학업, 취미생활 등의 일상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중략) 모두의 아픔이 보다 자세히 말해졌으면 좋겠다. 엄살이라는 말이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적고 말하고 듣는 일이 원활해졌으면 한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상들이 언젠가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나의 지겨운 질병이, 도저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대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구체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위통 탓에 흰 죽을 달고 살 때마다 입에 대지도 못할, 시뻘건 양념으로 범벅된 음식을 강력히 원했던 것처럼 그간 잊고 지내던 나의 강한 욕망과 호기심이 침대 위에서 한없이 들끓고 있었다.
--- p.28
미묘한 감정이 요동치던 순간이었다. 체온 유지실은 내게 느슨한 공동체의 공간이다. 가끔은 지겹도록 끈끈한 유대를 제쳐두고, 서로 간의 역사와 현재를 모르는 이들과 약한 유대를 이어나간다. 수영복을 모두 입거나, 반쯤 입거나, 혹은 맨몸인 채로.
--- p.46
매일 많은 양의 콘텐츠를 게걸스레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그 농담들을 따라 잡고 있었다. 뭐가 됐든 체력이 바닥나도 침대에 누워 웃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한다.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을까? 침대 위에서의 낭독회나 파티, 배달이 가능한 전시는 불가능한 것일까?
해결책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불안을 증폭시켰다.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한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침대에 못박혀 있는 상상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 p.58
그 말은 내게 오키나와 해변의 쨍쨍한 햇볕과 야쿠자들의 스모 그리고 폭죽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짧았던 부산 여행은 그를 괴롭혔던 나쁜 악몽들을 잊기 위한, 본능적인 유희가 아니었을까. 류는 쨍쨍한 해가 짙은 어둠과 그림자를 상기시킨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반대로 서늘하고 지독한 어둠은, 뜨겁고 쨍쨍한 빛 같은 게 실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 p.79
‘귀여워하는 것’에는 분명 위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애교를 요청하는 자와 부리는 자 사이의 위계처럼 말이다. 때문에 유튜브로 ‘귀여운 동물 동영상’을 보며 심신을 달랠 때, 한편으론 마음이 영 불편해졌다. 개나 고양이가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웃음이 터지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여움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던가? 모든 것에 철저히 능숙한 이들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딘지 어색한 모습과 솔직한 빈틈을 보이는 자들만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다.
--- p.102
커다란 변화는 지난날에 관한 의심을 품게 했다. 몸이 그새 변화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내가 정말 죽도록 아팠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아픈 몸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내게 엄살을 피웠다며 손가락질하는 상상을 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과거는 터무니없이 무시무시해지기도, 시시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의심은 더욱 커져갔다. (중략)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 앉아 다시 찾아올 강력한 통증에 대해, 다시 시작될 침대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상상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으나 오랫동안 몸에 달라붙은 상상력은 불안의 충실한 원동력이 되어갔다.
--- p.122~123
어떤 강경한 배제들, 그리고 이를 너무나 강하게 믿는 누군가의 다소 엉뚱하고 천박한 배제들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변화를 꾀하는 세상의 수많은 일은 언제나 강경한 태도를 가졌던 것만 같았다. 내가 종종 읽고 보았던 어떤 운동들이 그랬다. 너무나 철저하고 강경했기 때문에 그래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성취할 수 있었던. 위태로운 극단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죽기 전에 이곳에 왔어요.”라고 말하는 이들은 아마 ‘마음을 잘 먹는 것’ 따위 이제는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 p.131
쉬엄쉬엄이라는 말이 점점 싫어졌다. 아프지 않을 때를 빠르게 누리고 싶었다. 언제 또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정체 모를 통증과 우울감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 p.165
내가 진료실 의자에 앉자 의사는 “어떠셨어요?”라고 한마디 한 뒤 펜을 잡는다. 나는 나의 신체화 증상과 감정의 진폭을 가능한 한 빨리 설명해야 한다. 감정 표현은 우울하거나 슬프다는 말로 추상화된다. 추상화는 내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모조리 삭제한다. (중략) 그러나 나는 이름 없는 통증과 감정의 기복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붙여지는 나의 병명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성분의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 p.176~177
침대에 누워 깔깔대고 웃다 보면 불현듯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세상의 많은 농담이 옳고 그른 것을 자주 헷갈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 웃음거리들을 보며 나의 몸과 아픔 또한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내 몸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체력이 부족한 모습, 밥을 새처럼 먹는 모습, 침대에 붙어 있는 몸, 납작한 가슴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보이는 것이다.
--- p.268
내가 수년간 아프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깨닫는다. 우리에겐 돌이킬 수 없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목격한다. 온라인 공간이 야기할 어떤 혁명의 씨앗과 수많은 구멍을.
--- p.283
겨울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움을 주는 주변인들에게 비용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가 꾸준한 합의를 해나간다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은 꾸준히 혹은 영원히 아픈 몸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 S의 말대로, 내 안에 강력한 여름이 존재하고 있을까?
--- p.290
만성 통증이 생긴 후 약 3년째에 아픈 몸에 맞추어 유동적인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안정적이지 않은 삶은 불안감을 주지만 적어도 질병을 가진 상태를 버리는 시간이라 여기며 나중을 위해 삶을 유예하는 일을 멈췄다. (중략) 4년간 아픈 몸으로 살며 나름대로 터득한 노하우들이 있다. 그것은 먼저 내 몸을 잘 관찰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여름에는 ‘쉬엄쉬엄이라는 말이 점점 싫어졌’으며 ‘아프지 않을 때를 빠르게 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분명 쉴 땐 쉬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밤을 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같은 시간에 약을 먹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땐 우선 메모로 그것을 대신한다.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보면 걸러야 할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 p.294~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