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지역의 경제, 언어, 사회구조, 네덜란드 칼뱅주의에서 잉카의 태양숭배에 이르는 다양한 신앙, 핀란드의 사아미족에서 아프리카의 이그보족에 이르는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4대륙의 사람들과 환경을 포함하는 거대한 세계이다. 존 엘리엇이 썼듯이, 대서양 세계의 편차, 즉 서반구에서 유럽 출신 정착자들 간의 편차, 정착자들 유형의 편차, 정착 환경과 토착 문화의 편차, 태도, 야심과 이상의 편차는 엄청나다. --- p. 85
네덜란드인이라고 덜 잔인하지 않았다. 한 동시대인에 따르면, 뉴암스테르담 근처에서 무방비 상태에 있던 인디언 100명을 급습하여 죽인 후에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졌고…… 그 조각난 몸은 불이나 물에 던져졌다”) 탈출했던 소수를 살펴보니 “누군가는 손을 잃었고, 누군가는 다리를 잃었으며…… 누군가는 손으로 자신의 창자를 잡고 있었으니, 모두 어딘가 찢기고, 베이고, 불구가 되어서, 그보다 더 참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을 전체 인구를 산 채로 불태운 네덜란드 병사들은 주민들의 두개골을 축구공으로 썼다고 한다. --- p. 89
17세기 대부분 동안에 “피로 물든” 영국령 자메이카는 해적들의 집결지였으며, 영국의 식민지 가운데 가장 무법지대였다. 그리하여 영국령 자메이카는 인도양의 소돔이요, 네드 워드Ned Ward에 따르면 “창녀들과 범죄자들 그리고 주정꾼들만으로 가득 찬 우주의 똥더미”라고 불렸다. --- p. 98
이 혼란의 시기에 아메리카가 낳은 유토피아주의만큼 유럽인의 상상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스페인의 가장 계몽적인 사상가들 다수는 스페인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강력한 개혁운동, 이베리아 반도를 휩쓴 천년왕국운동의 심오한 사조, 그리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로부터 현저한 영향을 받아, 신세계라는 순수한 땅에 진실로 사도적인 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신이 주신 기회, 즉 진실로 신이 주신 의무를 발견하였다. --- p. 105
스페인은 불가피하게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기업가에게 경제의 문을 열었다. 영국, 제노바, 플랑드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외국 상인들은 세비야와 카디스에 있는 그들의 중개사무소를 통하여 중요한 재화들을 제공하였고, 그 대가로 스페인의 대서양 무역 체제의 많은 부분을 통제할 수 있었다. “제노바부터 함부르크까지 유럽의 절반”이 스페인의 서인도 제도 무역을 통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착취하는 “대규모 사업”에 관여하였다. 17세기 말에는 스페인의 유명한 호위선단인 플로타와 갈레오네에 선적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물품의 94퍼센트는 스페인 이외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이었다. 카디스를 경유하는 수출품의 40퍼센트는 프랑스에서 생산된 물품이었다. --- p.119
프랑스의 설탕 물품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대륙에 밀반입되었는데, 이는 부패한 세관 관리들이 장려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반입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표준화된 뇌물의 목록을 제시하는 설명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북아메리카 항구들의 상황은 “밀반입의 합법화”가 표준적인 이익 형태가 되어버린 카디스의 상황과 유사하였다. 카디스에서는 가난한 귀족들이 정기적으로 확실한 수수료를 챙기면서 도시 담벽 너머로 기꺼이 금은 꾸러미를 넘겨주었고, 승선 세관감시원은 미등록 물품을 배에서 내리는 것을 묵인하였다. --- p.122
역설적이게도, 원칙적으로 성직자 계서제를 철저히 반대하던 퀘이커교도들이 모든 영국 교파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통합되고 규율이 잘 잡힌 범대서양 종교조직을 이루어냈다. 처음부터 그들은 영국 북부의 본부에서 해외를 바라보고 저지대 국가, 독일 국가들, 스칸디나비아,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무엇보다 서반구의 영국 식민지 등 모든 방향으로 선교사들을 보냈다. 1655년부터 1660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영국의 모든 대서양 식민지에 상륙거점들을 설립했고, “방대한 지역에 걸쳐 그들을 단단히 붙잡았던” 유대체계를 구축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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