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문에 돌아왔다.
여객선 갑판에서 마침내 산지우스티니아노가 눈에 띄었을 때 노트에 적었다. 오로지 그 때문에 돌아왔다. 우리 집이나 섬, 아버지를 위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마지막 여름의 끝 무렵에 버려진 노르만 양식의 예배당에 홀로 앉아 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며 바라보던 본토의 풍경 때문도 아니다.
--- p.10
내가 속상한 것은 이제 우리 집이 없고 그 안의 살아 있던 것들도 사라졌으며 이곳에서 보내는 초여름이 결코 예전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을 지리에 바삭하지만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소심한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부모님도 없고 수영 후 배가 고파서 헐레벌떡 돌아온 나에게 간식을 챙겨 줄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모든 의식이 해체되고 무효가 되어 버렸다. 이곳의 여름에는 더 이상 내가 없었다.
--- p.21~22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눈이 너무 맑았다. 그 눈을 만지고 싶은 건지, 그 안에서 헤엄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 p.25
매일, 매시간, 매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삶이 어떻게 펼쳐져 나갈지 추측하곤 한다. 그것이 추측의 묘미다. 추측은 우리를 닻처럼 잡아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라는 작은 힌트조차 주지 않고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가 언제까지나 그대로이고 영원히 그 이름을 간직할 거라 믿는다. 친구들과 영원히 친구일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믿음으로써 믿어 온 것을 잊어버린다.
--- p.52
하지만 이곳은 내 삶이 시작되고 멈춘 곳이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집에서 오래전 여름,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린 10년 전에 모든 걸 바꿔 놓았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내 삶을 시작하고 멈추었다.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난니. 어디를 가든, 누구를 보고 갈망하든, 결국은 당신의 반짝이는 빛을 잣대로 재게 되죠.
--- p.78
운명은 언제나 표시를 남긴다.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은 그 표시를 알아보고 읽을 줄 안다.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전부를 주었을 것이다.
--- p.97
사진에서 수영복 차림의 난니와 아버지가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난니는 오른팔을 아버지 오른쪽 어깨에 대고 왼팔로는 아버지의 왼쪽 어깨를 잡았으며,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난니도 웃는 얼굴이었다.
--- p.102
갑자기 그녀를 향한 부드러운 마음이 커진다. 이게 사랑일까, 아니면 나를 비롯한 세상 모든 사람이 살면서 빛나는 로맨스를 갈망하듯이 로맨스를 쫓는 사람을 위한 연민일 뿐일까?
--- p.114~115
나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름이 뭔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하지만 매일 아침 당신의 벗은 몸을 봅니다.
--- p.162
아버지는 내 감정의 색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마치 서로에게 달려드는 쌍둥이 뱀처럼 한 가닥으로 엮인 병과 약. 아버지는 이게 사랑이라고, 다름이 사랑이고 두려움 자체도 사랑이고 네가 느끼는 경멸조차도 사랑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누구나 잘못된 방식으로 얻는다고. 어떤 이들은 사랑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또 어떤 이들은 몇 년이 걸리며, 또 어떤 이들은 나중에 뒤돌아보고서야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고.
--- p.182
당신은 무릎 사이에 라켓 두 개를 쥐고 캐노피 아래 앉아 나를 보고 말하겠죠. 오늘 코트가 젖었어요. 내일은 눈이 올지도 모른대요. 그 말을 내가 먼저 한다면 사실은 이런 뜻이 되겠죠. 어쩌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요. 낮부터 밤까지. 가요, 나와 함께 살아요.
--- p.213
“지금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리워할 심장 따위는 없겠지만 그리울 거야.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위해 지금 그리워하는 걸세. 내가 가 보지 못한 곳, 해 보지 못한 일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 p.249
우리 두 사람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바꿀 용기가 있을까? 그때는 있었을까? 지금은 있을까? 평일 이틀간의 도망으로 우리가 과연 용감한 축에 들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사랑에는 후회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많은 후회가 끼어들어 있을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 p.287
“우린 절대 끝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절대 끝나지 않아.”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별의 사랑, 내 사랑, 별의 사랑. 살지는 않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아.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가져갈 유일한 것. 너도 그렇겠지.”
--- p.293
가장 친애하는 당신.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모든 이메일을 그 말로 시작했다. 잘 자라는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친애하는 당신.
---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