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에는 뒤샹이 <모나 리자>의 엽서를 이용해 그녀의 얼굴에 코밑수염과 염소 수염 같은 턱수염을 그려 넣었다. 뒤샹은 “그 대중적 명성이 신화적인 경지에까지 오른 예술 작품에 버릇없이 굴었으며, 따라서 이는 당연히 도발적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뒤샹이 좀 재미있을 뿐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걸 보고 대경실색했다. 특히 뒤샹이 그 결과물을 L.H.O.O.Q라고 불러 신성 모독을 두 번이나 한 꼴이 되었던 탓이다. L.H.O.O.Q는 프랑스어로 한 자 한 자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가 된다.
--- p.356
1911년 8월 21일 이른 아침, 루브르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장식가인 빈첸초 페루자가 이 그림에 둘도 없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문을 닫는 일요일이었다. 페루자는 1909년에 베아른의 백작 부인이 기부한 16세기 이탈리아 액자에서 <모나 리자>를 꺼내 코트 밑에 감춰 가지고 나갔다.
140만 부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프티 파리지엔》은 도둑맞은 그림의 사진을 크게 싣고 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진 라 조콩드”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나왔다(8월 23일). 그리고 그 밑에는 “…`…우리는 아직 액자는 가지고 있다”는 신랄한 논평이 실려 있었다. 이런 식의 기사로 《프티 파리지엔》 같은 신문은 거의 날마다 1면에 <라 조콩드> 사진을 실으며 거의 3주를 끌었다. 이 기사는 모든 사회 계급을 열광시켰고, 이제 그들은 가속도가 붙은 르네상스 시대 예술에 대한 강좌를 듣고 있었다. 《프티 파리지엔》은 거의 날마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에 관해 언급했다. 도둑맞은 지 일주일 만인 8월 30일, 마침내 루브르가 문을 열자, 마치 많은 사랑을 받던 유명 인사가 세상을 떠난 듯 파리 시민들이 개인적인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박물관에 찾아가 빈 공간을 바라보며 <라 조콩드>를 걸어두었던 갈고리를 유심히 살폈다.
--- pp.302~303
<모나 리자> 역시 세계적인 명성 탓에 대중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고급 문화의 산물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가운데 한 명이 그렸고, 프랑스 왕이 사들였으며, 세계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한 곳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것은 시간의 시험을 견디어냈다. 1568년에 그것은 레오나르도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며 화가이자 역사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걸작으로 간주되었다. “이 얼굴을 보면, 예술이 자연을 얼마나 모방할 수 있는지 누구나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솜씨가 가장 막강한 예술가마저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세기 반 후에 예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이 그림을 이렇게 환호했다. “그녀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 눈앞에서 표정이 변하는 듯하며, 그녀를 다시 찾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불가사의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도 이것은 불가사의하며, 우리는 이런 것을 흔히 위대한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을 위해 2000년 2월에 한 여론조사 연구 기관이 이탈리아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보기를 주지 않고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가운데 85.8퍼센트에 달하는 압도적인 다수가 <모나 리자>라고 대답했다.
3.6퍼센트로 2위를 차지한 것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였고, 3위를 차지한 것은 보티첼리의 <봄>(2.1퍼센트), 4위는 뭉크의 <절규>(2.01퍼센트)였다. 그리고 2000년 2월 6일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루브르 박물관 안내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받은 질문은 “<라 조콩드>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질문을 76번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는 실존적인 질문이었다(53번). 이에 비해 “<밀로의 비너스>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단 한 번뿐이었고, 그 밖에 특정한 그림이나 조각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 pp.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