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如是我讀
1936년 루쉰이 타계하자 린위탕은 ‘공산당 투항자’를 향해 “그와 지기가 된 것을 기뻐하였고, 루쉰이 나를 버렸을 때도 유감이나 후회가 없었다”고 애도했다. 생전에 루쉰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스(胡適)를 치고, 가장 훌륭한 산문가 셋 중의 하나로 ‘서양 똘마니’ 린위탕을 꼽았다. 루쉰과 린위탕의 관계는 두 책 내용의 일부일 뿐이지만, 내게는 특히 그 험난한 시대에 그들이 나눈 ‘비판 속의 우정’이 몹시 부러웠다.
--- p.73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
“체코 폴란드 물러가라.” 이 플래카드 구호를 외치면서 나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처음 알았다. 1953년 휴전 협정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는 이들 중립국감시위원단을 향해 관제 데모를 조직하고 우리 초등학생까지 동원한 것이다. … “예전에는 가난해도 가난한 줄 몰랐는데, 요즘 부자 이웃을 보면서 가난을 느낍니다.” 실업?물가?무역적자 등 시장의 교훈은 혹독했고, 임금 삭감과 복지 축소를 위시한 계획 포기의 복수는 신랄한 것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대신 이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를 외칠 참인가? 반세기 전 고사리 주먹을 흔들며 ‘물러가 데모’에 나섰던 그 체코를 찾은 날, 프라하는 봄인데도 때아닌 진눈깨비가 내렸다.
--- p.94
성장이냐 분배냐를 넘어서서
학위를 얻고 돌아와 직장을 구할 때였다. 뒷날 총리를 지낸 은사 한 분이 무슨 공부를 했느냐고 물으셨다. 분배론 쪽으로 논문을 썼다고 했더니, 일순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러시는 것 아닌가. “이력서에는 그렇게 쓰지 말게.” … 나는 노동자 복지가 한층 향상되고, 사회의 빈부 격차가 더욱 축소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분배론자’이며, 그래서 전하고 싶다. 성장을 통해서는 분배의 공정을 도모할 수 있지만, 공평한 분배로는 성장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말을. ‘꼴보수’ 주장의 복사판이다! 분배가 요즘처럼 일품 메뉴가 되기 전에도 나는 분배를 찾다가 찬밥 설움을 톡톡히 받았으니 다소는 분배의 유연성을 당부할 자격이(?) 있다.
--- p.161
보수든 진보든 ‘진짜’이기를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높은 보수를 받고,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헐거운 정직성의 기준을 요구하는 데서 나는 286이니 386이니 하는 인위적 패거리가 만들어내는 실패의 교훈을 느낀다. 첨단 과학 발전의 세계화 시대에 정치적 정직성이니 정책의 공평성이니 하는 덕목들이 말짱 힘빠진 주장임을 잘 안다. 그렇다고 거기 무슨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영웅을 본뜬 〈영웅본색〉 따위로 한순간이나마 위로를 찾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면, 그것은 너무 삭막하지만 또한 피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 p.236
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통독에 따르는 이런 고통 호소가 내게는 배부른 자의 과식 경고로 들렸다. … 종업원 1400만 명의 ‘부실 기업’을 인수했다는 야유가 서독 일각에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통독을 ‘동독 민주화 혁명의 완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었다. 북한 주민도 한 민족으로 남한만큼 잘살 권리가 있으며, 남한이 북한을 돕는 것은 유세가 아니라 의무라는 독일 학자들의 권고에 내심 크게 당황하고 크게 부끄러웠다. 남의 나라 얘기에 가슴이 뭉클하다가도 북한-미국-중국의 베이징 북핵 회담에 남한이 빠진 서글픈 ‘민족 공조’ 현실에 그만 맥이 풀렸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