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에게는 작은 욕망이 하나 있다. 이 집에서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자기보다 일찍 태어난 첫째와 둘째는 군더더기라는 사실을 자꾸만 알리려 한다. 그리하여 막내는 자기보다 일찍 세상에 나온 두 ‘장애물’을 모방해 그들의 모든 특장점을 자기 몸에 새기려고 온 힘을 다한다. ‘백과사전’처럼 모든 걸 다 아는 유일한 아이가 되어 일찍 태어난 자들의 ‘무가치’를 폭로하려는 거다.
--- p.24
아빠가 ‘일찍 태어난 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걸 막고자 막내는 아빠를 바쁘게 할 방법, 1초도 쉬지 못하게 만들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한다. 퇴근한 아빠가 문에 들어서는 순간, 막내는 일식집에서 손님이 스시를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듯 손뼉을 탁탁 친다. 그러고는 “안아줘, 안아줘” 하면서 일단 아빠를 옭아맨다. 막내는 진즉에 조그만 파충류에서 인류로 진화했지만, 아빠를 ‘점령’하는 첫 단계는 아빠를 다시금 ‘안아주는 기계’로 만드는 것임을 잘 안다. 이제 막내는 높은 곳에 군림해 일찍 태어난 자들을 내려다보며 잔뜩 우쭐해 있다. ‘인간 배’에 승선한 막내는 키잡이가 되어 아빠를 멋대로 조종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한다. 높이 높이, 봐봐, 씻자, 물, 과자, 얼음, 마실 것, 가져와…… 선장처럼 끊임없이 명령을 내린다.
--- pp.25~26
10시 20분.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 머리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개찰구의 좁은 문이 열린 것이다. 뚱보가 압축될 만큼 좁으면서 뛰어넘을 수는 없는 높이의 구식 개찰구라 ‘유치장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자리가 정해진 열차지만 모두들 현대의 리듬에 맞춰 밀치고 다투며 기차에 오르고, ‘빼앗길 수 없도록 정해진’ 자리를 ‘격렬’하게 ‘빼앗아’ 부랴부랴 자리에 앉는다.
--- pp.38~39
인생은 늘 이렇게 시끌벅적하다. 이런 이치를 깨닫는다면 우주의 끝없는 탄생을 이해할 것이며, ‘쓸쓸한 분위기’를 추구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리라. 해 질 녘마다 벌어지는 우리 집 금빛 모임이 아주 좋은 사례다. 석양이 담장 밖으로 뻗은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불그레한 금빛으로 물들이고 처마와 용마루에도 눈부신 금테를 둘러준다. 저녁바람에 처마 끝에서 풍경이 울린다. 아란이 나와서 꽃에 물을 준다. 첫째와 둘째가 ‘300근’ 책가방을 메고 돌아온다. 아마 책가방에도 석양빛이 내려앉았으리라. 현대 시인이 쓰는 표현인 ‘도약이 어마어마하다’ 같은 식으로 묘사하자면―두 선녀가 금빛 보따리를 메고 귀로에 접어들었다.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쓸쓸히 하루를 보낸 막내는 드디어 ‘혼잣말’ 수업을 마치고 앞으로 나아가 환영사를 외친다. “언니들아, 집에는 뭐 하러 왔는데!” 막내는 다가가서 언니들 옷을 잡아끌고, 언니들 도시락통을 받아들고, 언니들 책가방을 끌어내리다가 ‘무거운’ 책가방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다. 세 아이는 세 마리 강아지처럼 야단법석을 떤다.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옥신각신 다투기도 한다. 시간도 잠시 아이들을 놓아준다.
--- pp.62~63
아이들은 다들 물장난을 좋아한다. 우리 집 첫째, 둘째, 막내도 제각각 ‘물장난 시기’가 있었다. 첫째가 ‘어릴 적에’ 좋아한 일은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채우고 집에 있는 모든 구두를 담가 ‘깨끗이 목욕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엄마 아빠는 이튿날 축축한 신발을 신고 출근해야 했다. 둘째가 깨끗이 씻긴 걸작품은 아빠의 책과 엄마의 립스틱이었다. 지금 막내는 수도꼭지 아래서 크레용, 종이, 휴대용 라디오를 목욕시키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 막내가 씻으면 안 되는 물건을 씻는 것을 막고자 우리 집 카메라와 망원경은 다 2미터 높이의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 p.65
흥정을 좋아하는 막내는 언제나 “아빠가 씻겨줘” 하고 지정한다. 이 ‘두 살 반’ 꼬맹이를 목욕시키는 일은 나도 사우나에서 땀으로 목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요 녀석은 모든 ‘가격표’를 붙인다. 옷 벗는 일은 ‘목욕 다 하면 과자 하나 주기’란다. 욕조에 들어가는 것도 과자 하나, 비누칠하려면 또 과자 하나, 욕조에서 나오려면 또 과자 하나. 한 번 목욕하고 나면 과자 네 개를 얻는다. 매 단계마다 일단 안 하겠다고 거절하고 본다. 그다음에는 뭔가를 요구하고, 요구가 안 먹히면 또 거절이다. 이렇게 서로 양보 없이 버텨도 요 녀석은 손해가 없고 나는 시간을 손해 본다. 어쩔 수 없이 과자 네 개를 시간과 바꾼다.
---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