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대한 책은 놀라운 채소 세상에 대해 던지는 찬사다. 내가 좋아하는 채소 중 50가지를 골라서 어째서 이 채소들이 요리사와 먹는 사람에게 특별 대접을 받는지 조금 깊이 파고든 다음, 요리 실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주방에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일단 이 책을 읽고 나면 뿌리채소, 구근, 줄기를 집어들 용기가 생기고 아이디어와 영감이 샘솟을 테니 반찬때문에 고민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다른 책을 활용할 때도 어째서 레시피에 이런 과정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따라하거나 변형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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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순식간에’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경이롭게 느껴지고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한 적이 있다면 그 비밀은 90%가 쇼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겠다. 완조리 식품이나 시판 스튜 같은 제품을 주기적으로 구입한다는 뜻이 아니며, 매일같이 고리버들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시장을 거니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주로 팬트리에 콩류와 곡물, 견과류, 씨앗류, 오일, 식초 및 기타 특이한 식재료 등의 건조 식품이나 양념류를 넉넉히 채워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신선 식재료나 냉동 식품의 맛을 보완하고 빛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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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직접 길러본 적이 있다면 길쭉하니 곧은 모양에 균일하게 주황색을 띠는 작물을 길러내는 것이 상당히 까다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건 당근이 원래 심지어 주황색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보라색이나 흰색, 심지어 노란색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색상을 멋진 재래 품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네덜란드인이 강력했던 오라녜 나사우Orange-Nassau 가문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주황색 당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나 된 후의 일이었다. 네덜란드 내에서 해당 가문의 권력은 강력할 때도 있고 약화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주황색 당근을 소유하거나 판매하는 것이 가끔 반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오늘날 오라녜 나사우 가문은 네덜란드의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나라 전체, 특히 스포츠 팬은 아직도 주황색에 열광한다. 그리고 한때 반역 취급을 받기도 했던 당근은? 감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채소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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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나 커리, 파스타, 수프 등 어떤 요리를 만들건 모든 길은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양파가 말 그대로 모든 맛있는 음식에 인상 깊은 풍미를 더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팬트리로 이어진다. 그냥 간단하게 신선한 식재료를 빵 2장 사이에 밀어 넣거나 샐러드를 만들 뿐이라 하더라도 양파는 그 맛을 완성시켜 준다. 산뜻한 단맛과 톡 쏘는 맛이 그 속에 들어간 모든 식재료의 맛있는 풍미를 강화시킨다. 양파가 소스에 완전히 녹아들도록 만들거나 깊은 풍미가 빠르게 배어들게 하고 싶다면 양파를 깍둑 써는 것이 좋다. 질감을 느끼고 싶다면 양파를 곱게 채 썰어서 천천히 볶는다. 믹서기로 곱게 갈 생각이라면 굵게 썰고, 구울 때는 덩어리째 쓰도록 한다. 그저 양파 ‘1개’로는 턱없이 부족하므로 항상 충분한 양을 저장해 놔야 한다는 점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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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 정원에서 완두콩을 까는 것은 주방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짧은 휴식을 보내는 가장 즐거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급속 냉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완두콩은 일 년 내내 언제든 음식에 더할 수 있는 녹색 채소가 되었다. 하지만 슈거 스냅과 스노우 피(프랑스어로 망제투mangetout) 같은 여러 종류의 깍지완두처럼 완두콩에 속하는 다른 작물도 작은 완두콩만큼이나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기뻐할 것이다. 가장 재배하기 쉬운 작물에 속하는 완두콩은 리소토에 터져나오는 부드러운 단맛을 선사하는 녹색 채소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진한 말린 완두콩 커리와 햄 수프 재료로도 쓰이는 등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전 세계의 요리 문화권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거의 채식으로 점철된 식단을 고수한 나일 삼각주 지역의 이집트인에게 완두콩은 현대의 달밧dal bhat 요리와 완두 단백질 스무디에 쓰이는 것처럼 귀중한 단백질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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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트리에 육수 여러 팩을 사다두거나 냉장고에 1~2병 정도 보관해 두면 손쉽고 빠르게 풍미를 구축할 수 있으며, 만족스러운 식사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육수를 사서 쓰려면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 집에서 직접 만든 육수의 맛을 능가하지 못한다. 가게에서 육수를 살 때는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성분표를 잘 읽어보고, 요리에 넣기 전에 반드시 맛을 봐야 한다. 일부 회사에서는 소금을 너무 과도하게 넣기 때문에 물을 섞어서 희석해야 하거나 마지막에 간을 맞추기 전까지는 소금을 넣지 않아야 한다. 직접 육수를 만들 때도 소금을 아예 넣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야 많이 졸여서 소스를 만들어도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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