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대가 이렇게 태어나 주어 참으로 고맙다.”
“어찌?”
“그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북망산천을 걸었을 것이 아니더냐. 그대는 오늘 내 목숨줄을 한 자나 더 늘려 주지 않았느냐.”
그것뿐이옵니까?
이랑은 말을 삼키고는 그를 보았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으나, 그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그를 빤히 보고 있는데 향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가락 말이다.”
“무슨 하문이시온지?”
“어제, 아니 오늘인가? 어쨌든 그대가 불렀던 그 가락을 한 번 더 들려주겠느냐? 바람이 창을 자꾸 건드리니 잠조차 달아나는구나. 쉬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청하는 것이다.”
하긴 묘시(卯時)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신시(辛時) 정이 될 시점까지 잠을 잤으니 잠이 쉬이 오는 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그것 보다 더 좋은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이랑은 자신이 잠들지 못할 때 어머니께서 불러주시던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냐? 불러 보거라.”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자장, 자장 예쁜 아기
“우리 아기?”
“아……. 송구하옵니다. 다른 걸로.”
아가, 엄마에게 오련.
아가, 엄마의 팔베개가 어떠냐.
아가, 엄마의 품이 어떠냐.
“아가?”
“소, 송구하옵니다. 그냥 어제 불렀던 걸로…….”
“팔베개라, 나도 어머니의 팔베개가 그립구나. 아니지, 모후께오서 나에게 팔베개를 해 준 적이 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내 모후는 내궁을 다스리고 부왕을 도와 정사로 바쁘시니.”
“아…….”
이랑은 두 사람을 갈라놓은 베개를 치우고 충동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뭐, 뭐하는 것이냐?”
휘둥그레 뜬 눈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이상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향이 눈썹을 획 치켜 올리고는 그녀가 내민 팔을 쏘아보았다.
“덮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불쑥 말하던 이랑은 툭 튀어나온 자신의 말이 망측하게 느껴졌다.
“아, 송구하옵니다. 그저 저하께 팔베개를…….”
이랑은 얼굴을 붉힌 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러니 장 대인이 그녀에게 조신과 거리가 멀다고 그 타박을 하는 것이다.
이랑은 어머니의 습성을 닮았다. 오랫동안 눌러도 억눌러지지 않는 어떤 기가 있었다. 이랑의 어머니도 생전에 행동거지에 거리낌이 없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기만 해도 사달이 났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런 어머니의 품성을 아버지는 더 좋아했다.
이랑은 향 또한 그걸 좋아할 것이라 불현듯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향의 뜨악하게 뜬 눈을 보니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향이 시비를 걸자면 이건 경을 칠 일이었다. 벌떡 일어나 일단 납작 엎드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 허공에 뜬 팔부터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이다.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뻗은 팔을 거두어들이는데 향이 물러나는 그녀의 팔을 확 잡아챘다. 이랑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고는 숨죽인 듯 그를 보았다. 그녀를 한 번 더 쏘아본 향이 머리를 들고 그녀의 팔을 자신의 목 밑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만 든 엉거주춤 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다가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어 오는 향을 보고는 너무나도 안도한 나머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지 말거라.”
향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네, 저하.”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소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지 말라 했다.”
“네, 그럴 것이옵니다. 저하.”
하지만 그의 말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배실배실 그녀의 입술을 통해 기어코 새어나왔으니 말이다.
“따박따박 대답만 하지 말고.”
향이 으르렁 댔다.
“네, 네. 저하.”
“그대와 달리 난 덮치지 않겠다고 한 적 없다.”
어깨를 떨며 간신히 웃음을 억누르는데 향의 입술이 확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순간 이랑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어 이랑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장 대인에게 배웠다. 또한 아녀자가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인의 부덕(婦德)을 배웠다. 그러나 자신의 입술을 안은 그의 숨결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이분은 차기 왕이시다. 또한 자신이 향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인의 부덕, 개나 줘버리라지.
그때,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억눌러 왔던 그녀의 본성이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