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면 진아와 긴 사랑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을 다 먹고, 커피를 다 마시고, 창을 닫고, 상 위에 올려진 열쇠로 문을 잠그고 열쇠를 우편함에 넣었다. 진아의 집을 나와서 뒤돌아보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3층짜리 연립주택이 나무 사이로 서 있었다. 음악도 없었고, 커피도 없었고, 바람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내가 너희 동네로 갈게.”
물론, 나는 혼자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나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주었다. (41쪽)
입속에서는 상큼한 기타 음들이 춤추듯 향긋한 기분이 감돌았고, 효정의 눈동자는 이슬에 흠뻑 젖은 듯이 촉촉이 빛났다. 효정의 눈망울은 갑자기 훌쩍 성장한 것처럼 커져버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속의 내가 보일 지경이었다. 효정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나는 소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인 효정 역시 아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이 들어, 나는 그만 효정에게 포근하게 감싸 안기고 싶어졌다. 창가에서 조촐하게 쏟아지는 햇살은 웃음기가 남아 있는 효정의 얼굴을 소담스레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때 효정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만 성인인 남자가 대부분 그렇듯 나 역시 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아지지 않는다는 걸. (106-107쪽)
편지지엔 단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앞뒤로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한 문장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란 사람을 온전히 주고 싶은 사람에게 마음껏 주게 해줘서 고마웠어요.
당황스러웠다. 연경의 입장에선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한 줄만 적힌 편지를 받으니 어쩔 줄 몰랐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오랫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한 문장이다. 연경은 하고픈 많은 말들을 버리고 버린 후 이 문장만을 택한 것이다. 나를 미워할 수도, 외면할 수도, 저주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감정 중 고마움 단 하나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나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덧 캠퍼스엔 싸늘한 저녁 공기가 감돌았다.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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