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을 형상화한 작품은 일본에서 ‘재해문학’으로 포괄하고 있지만 한국인 작가가 쓴 시와 소설은 일본 작가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에게 관동진재는 자연재해였지만 대학살 피해자인 한국인에게는 민족과 인종과 타국민의 갈등이 분출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제노사이드이기 때문이다.
항일 저항시와 문학의 근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그 당시 참상을 목격하거나 관련된 문인은 시인 김소월, 이상화(애족장, 문화운동), 김동환(친일, 문학), 김영랑(건국포장, 국내항일), 박용철, 유치환, 유치상, 장정심, 고한용, 소설가 이기영, 채만식(친일, 문학), 한설야, 정우홍, 이익상(친일, 언론), 정연규, 수필가 이양하, 김소운, 극작가 유치진(친일, 연극), 이서구(친일, 연극), 조준기, 아동문학가 최신복(친일, 언론), 평론가 김문집(친일, 문학), 불문학자 손우성, 비교문학 이하윤 등으로 대부분 유학생으로 참상을 목격했다. 김기림, 김말봉, 김영진, 박승희, 손진태, 정지용, 진장섭, 한식, 김두용, 김희명, 최현배(독립장, 문화운동), 김상용(친일, 교육학술) 등은 당시 현지에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양주동, 이장희, 유엽 등은 방학 중 귀국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기획했던 근대문학사 최초의 본격적 시 전문지 《금성》을 백기만, 손진태, 이상백(애족장, 3·1운동) 등과 1923년 11월 10일에 창간했다. 김소월은 한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가족들이 죽었다고 포기했다. 신석정 시인 형님 신석갑과 사촌 매형 소설가 정우홍·이익상 소설가 신석상 아버지 신기형도 당시 동경 유학생이었다. 윤동주(독립장, 학생운동) 시인 아버지 윤영석도 참상을 목격한 뒤 명동촌에 무사하다는 전보를 치고 급히 귀국했다. 시인 구상의 맏형인 구원준도 지진 이후 행방불명됐다. 시인 홍사용의 19살 아래 막내동생으로 왕족을 제외하고 한국인으로 유일한 일본군 육군대학 출신인 홍사익(친일, 군)도 참상을 목격했다.
이육사(애국장, 의열투쟁) 시인은 대학살 다음 해 4월부터 1925년 1월까지 동경에 유학하였다. 강기덕(독립장, 국내항일)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시인 김동명은 1925년 일본 청산학원 신학과를 입학하여 일본대학 철학과를 수학했다. 염상섭은 도쿄에서 양주동 나도향 등과 지냈으며 「숙박기」(1928)를 썼다. 1927년 1월에 동경에 온 김용제(친일, 문학)와 3월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백철(친일, 문학)은 제노사이드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일본어로 써서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가 대한민국 근현대문학사의 분기점으로 파스큘라(PASKYULA)와 카프(KAPF)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폭제다
---「항일 저항시의 근간은 관동대학살이다」중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제노사이드 당한 피해 사망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齋藤?] 총독의 2명에서부터 독일 외무성 보고의 23,058명까지 편차가 큰 만큼 발표마다 다르다. 1923년 11월 15일 당시 일본 사법성 조사에는 233명 조선총독부는 832명 ‘조선인박해사실조사회’와 《중앙공론》 편집장인 정치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613명이나 다른 기록에는 2,712명이라 주장했다.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재일한국인의 인식이 통일되진 않았다. ‘15엔 50전[쥬고엔 고쥬센]’의 발음은 탁음의 연속으로 한국어에는 탁음이 없으므로 ‘쥬고엔 고짓센’으로밖에 발음할 수 없다. 이때 바로 조선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은 그 자리에서 살해된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대부분 살아났고 죽은 이의 대다수가 노동자다.
김희명 작가는 2천여 명과 재일조선 YMCA의 총무 최승만은 2만여 명(『나의 회고록』 명단 확인 29명) 조도지[成道寺] 위령비 17명 도쿄도 위령당 83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재일본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반 조선인학살 최종조사보고」와 1923년 11월 28일까지 집계한 「상해교민 보고서」인 「일만의 희생자」 1923년 12월 5일 자 임시정부 《독립신문》에 6,661명이라 실렸다. 일본 사법성은 380명으로 축소하며 왜곡했다. K·H·S라는 필명은 5천여 명이라 주장하고 《신한민보》 톰킨스 박사 항의서에는 500여 명이라 적혀 있다. 독일 부르하르트 기사 및 방문기 요코하마[?浜] 15,000명 합산 독립신문(상해판)에 피학살 조선인은 21,600명이 달한다고 발표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관동대지진은 1924년부터 사실상 잊혀진 기억이다. 2013년 주일한국대사관에서 ‘일본진재시 피살자 290명 명부’가 발견됨에 따라 처음으로 희생자 명부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었다. 북한은 줄곧 관동대지진 당시 2만 3천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해방공간 좌와 우 한국전쟁 전후의 이념대립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와 5·18항쟁 희생자 숫자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을 배반한 자료를 없애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넘치는 부와 거짓 명예로 거들먹거리며 왜곡된 현실을 즐기는 대한민국 100년 전 제노사이드 참상의 진상을 외면하는 탓일까
---「제노사이드 당한 조선인 수」중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에 관련하여 정부문서 증언과 기사 각계의 논평 논설 등 자료를 모아놓은 질과 양에 있어서 지진이 일어난 일본 쪽이 많으나 일본 관련 단체나 정치인의 답변은 ‘연구 중·검토 중’이라 밝힐 수 없단다
한국 쪽은 조선총독부 관보인 《경성일보》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미주지역 《신한민보》 만주에서 발간된 《만주일일신문》과 《신천지》 등의 보도와 논설 해방 후 〈재일선인단〉의 문건을 제외하고는 상해임시정부 발행한 《독립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두 신문의 보도와 논설이 당시 조선 쪽 반응을 보여주는 자료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동경 일원 조선인 15,000여 명 중 유학생 2,000여 명 9월 10일 개학 맞춰 1,500여 명은 현장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필자가 학다리중앙국민학교 입학 무렵 아버지는 함평 무안 학다리 오일장 점포를 열고서 제물과 과일과 헌 신문지를 팔았다. 그 당시는 어물도 신문지로 싸서 팔았다. 깜박산[坎方山] 아래 도산 외가에서 투병하는 어머니를 그리며 광에 쌓인 옛 신문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 힘인지 지금도 자료를 찾는다고 컴퓨터로 옛 신문을 뒤적이며 노동자는 외면하고 학생들 이름과 대도시 출신지만 먼저 눈을 주면서 뼈저린 통한의 역사인 친일 미청산과 남과 북 단절로 인하여 가로막힌 계급과 이념의 벽이 높고 깊어 눈에 익지 않은 이름 앞에서 이 밤도 지샌다
---「한국인 제노사이드 자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