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무엇과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한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
---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 중에서


질문은 여전할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나의 버릇을
아무리 밀어내도 고여오는 불안과 우울을
어떤 것도 다 가능해지는 환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얼음잠을 자고」 중에서


어느 날 툭 통증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지만
내내 신경이 쓰이고 거슬리고 괴로운,
약도 없고 원인도 모르는 해괴한 병 아닌 병들.
통증으로만 존재하는 병들은 일종의 경고 같다.
꼼짝없이 서서 뒤돌아보게 만드는 경고.
--- 「자각 증상」 중에서


백 년 뒤에 깨어나기 위해 얼음잠을 자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버거웠던 건 늘 미래가 아니다.

지금 고칠 수 없는 병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언제나 당대가 문제이고
당대는 문제인 한에서만 당대인 것이다.
--- 「얼음잠을 자고」 중에서


인간에 대한 최대의 딜레마는
재난으로 죽은 사람보다
사람이 죽인 사람이 더 많다는 것. 슬프지만
우리의 행운은 언제나 누군가의 불행에 빚지고 있다.

섭생이 섭식이고, 섭식이 포식이지만
아귀 배를 가르자 쏟아지는 물고기들
종종 어떤 식욕은 이편의 입맛을 없애버린다.
--- 「물구경」 중에서

누군가의 솔직함이 다른 수준에서는 잔인함이 되듯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처럼
사실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한 충고는 없다
--- 「까다로운 주체 2」 중에서

그는 짧고 간결한 방법으로 말한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말을 할 뿐인데
다른 게 있다면 필요의 크기랄까.
하긴 이미 배고프고 사랑하고 떠나고 싶은 사람에겐
말이 필요가 없다.

<b>“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br/>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b><br/><br/>말매미 한 마리가 우화하지 못하고 죽어 있다.<br/>벌어진 번데기 등을 반쯤 빠져나오다 멈췄다.<br/>다른 매미들의 벌건 울음을 배경으로<br/>결국 이게 다인가요?<br/>오늘 아침의 마른하늘을 쳐다보며<br/>나는 물었다. 하늘은 묵묵부답.<br/>신은 대답하지 않는 한에서 신이었다.<br/>정말이지 모든 것을 안다면 <br/>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br/>스스로 대답해본다.<br/>불행을 배경으로 삶을 보면<br/>어떤 일도 견딜 만해진다.<br/>_「질문 있는 사람」에서<br/><br/>“신은 대답하지 않는 한에서 신”이고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구하는 한에서 인간이리라. 그러나 “불행을 배경으로 삶을 보면” 누군가의 행운과 나의 불행, 나의 행운과 누군가의 불행이 무관해 보이지 않고, 그것이 현실의 작동원리일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갑갑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br/><br/>팔이 부러진 신(神)은 <br/>놀라서 울고, 아프고, 잠들고, 소스라친다.<br/><br/>아픔을 보는 것만으로 <br/>몇 배는 더 아플 수 있지만<br/>결국 대신 아플 수는 없으며<br/>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는 사람들이란<br/>자기를 책망하고 힐난하는 것밖에 없다.<br/><br/>불행을 믿고, <br/>불안에 의지하며, <br/>행운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br/>쓸쓸한 신앙인일 수밖에 없다.<br/>팔에 붕대를 감은 신이 깨어나<br/>롤리팝을 핥으며 <br/>세상을 다 가진 미소로 화답하기까지는.<br/>_「셋 중 하나」에서<br/><br/>아픈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신’, 대신 아플 수조차 없는 우리는 “불행을 믿고,/ 불안에 의지하며,/ 행운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신앙인”으로 목마른 질문을 계속해갈 수밖에 없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라고 물을 때의 무력함이, “아무리 밀어내도 고여오는 불안과 우울을/ 어떤 것도 다 가능해지는 환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얼음잠을 자고」)라고 물을 때의 안간힘이, “결국 이게 다인가요?”(「질문 있는 사람」)라고 물을 때의 갈급함은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다섯시에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한다.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를 보고,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 소리”(「가로등 끄는 사람」)를 듣게 한다. 그런 존재들이 보인다는 건 얼핏 안심이 되기도 한다. “무너진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br/><br/>우리는 만나면 안녕? 하고 묻고<br/>헤어질 땐 안녕, 하고 말해요.<br/>질문이고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 안녕이에요.<br/>엄마가 제 소원을 묻는다면 저는 부탁하고 싶어요.<br/>안녕해주세요. 안녕이라고 말하고 <br/>우리는 안녕이 되고 싶어요<br/>_「생일 소원-생일을 맞은 이태민으로부터」에서<br/><br/>그러므로 일상에서 무감각적으로 반복해 사용하는 인사 “안녕”은 “질문이고 대답이고 부탁인 말”일 수 있다. 삶의 문제가 무엇 하나 쉽지 않고 자주 무너질 것 같을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안녕이 되고자 할 때,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살아가는 일이 존엄함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믿고 싶어진다. 그 마음은 때로 작은 의지와 용기로 이어지기도 할 터이다. <br/> <br/><br/><b>■ 이현승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b><br/><br/>Q1. 어느덧 네번째 시집입니다. 출간 소회를 여쭙습니다. <br/><br/>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이 명확해지는 시점에 네번째 시집을 냅니다. 하지만 누가 압니까? 매일이 안 살아본 날들입니다. 알겠다 싶은 것은 피로와 불안, 무언가를 자꾸 잃게 되는 아픔들이지만, 그렇게 뭔가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네번째 시집을 내봅니다. 감사와 설렘이 또 처음처럼 도사립니다.<br/><br/>Q2. 시집 제목과 컬러는 어떻게 결정하신 건지 궁금합니다.<br/><br/>제목과 컬러는…… 오랜 경험상 편집부의 조언을 듣자! 듣자! 그런데, 또 조금씩 소심한 주장을 했습니다. 제목은 편집부의 적극적인 추천과 저의 시적 지향이 만나는 지점에서 골랐습니다. 시집의 후반부에 있는 시에서 따온 구절이고요. 안녕이라는 말이 질문이고 대답이면서 동시에 부탁인 말이라는 취의를 넣은 제목입니다. 세번째 시집에서 네번째 시집으로 넘어오는 동안 저 개인과 우리 사회는 위험과 재난의 파도를 넘고 넘어왔습니다. <br/>시집 컬러는 저의 ‘최애’색을 골랐습니다. 저는 녹색과 갈색을 보면 마음이 편합니다. 이른바 나무색이죠. <br/><br/>Q3. 해설을 쓰신 오연경 평론가도 짚어주었듯, ‘실패라는 삶의 형식’ ‘쓸쓸함과 외로움’ ‘불안과 우울’의 색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이번 시집 속 시들을 쓰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었거나 천착했던 지점이 있으실까요? <br/><br/>저는 현실을 직시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습니다. 현실이란 눈을 뜨고 본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매일 실감하고는 합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쓸 말이 없어서 겉돌기가 일쑤입니다. 제 시에 실패가 자주 보인다면 그만큼 직시하는 힘과 용기가 생겼다고 봐야 할 텐데, 삶이 그게 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언어로 내려와 있는 제 삶을 있는 그대로 쓰고 싶다는 고집으로 썼습니다. 거창하진 않지만, 저 나름대로 시시포스처럼 매일 굴러떨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중이죠. 쓸쓸함과 외로움, 불안과 우울은 제가 삶을 초근접 거리에서 목격했기 때문일 거고요. 네번째 시집에서 저는 삶을 그렇게 근접 거리에서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br/><br/>Q4.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도요.<br/><br/>다섯 개의 질문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함. 결국 실패. 그렇게 적고 싶습니다. 처음 시집을 묶었을 때엔 자신의 외로움을 들여다보는 시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혁명의 열기가 지나간 괴괴한 자리 말이에요. 거기 남겨진 부끄러운 감정요. 외로움.<br/> <br/>Q5. 이 시집을 읽을 독자분들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려요<br/><br/>제가 제 지인 중의 한 사람을 참 원만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너의 원만함의 기준은 뭐냐?” 네, 우리가 이렇게 가깝고도 멀게 살고 있는 듯합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멀지만 가깝게 느껴지길 바랍니다. <br/><br/><br/><b>■ 시인의 말</b><br/><br/>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을 피했을 뿐이라고 <br/>철 지난 선거 같은 것을 두고 누군가 말한다면 <br/>그는 최소한 시급한 변화가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br/>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br/>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더 오래 머뭇거리고 있지만,<br/><br/>이 분명한 없음과 분별하기 힘든 있음들 사이에서<br/><br/>그리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사람은<br/>삼나무 숲에서 삼나무를 찾고 있는 사람과 같다.<br/>삼나무 숲에 들어섰으니 삼나무는 찾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안심하겠지만<br/>눈앞에 두고 찾지 못하는 맹목이 가장 어둡다.<br/>물론 나는 수 년 전 어느 밤 혜화역에서 택시를 잡아탄 취객이 <br/>“대학로 갑시다”라고 큰 소리로 말한 것을 기억한다.<br/>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그의 행선지가 궁금했지만<br/><br/>낫 굿 낫 뱃, <br/>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삶은<br/>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삶이지만<br/>뜻한 바대로만 되지 않는 삶이라서<br/>이미 읽은 전단지를 한나절 내내 뒤집어 읽는 공터의 바람처럼<br/>필사적이고 간절한 기도가 더 빤하고 평범하기 쉽다.<br/><br/>마찬가지 이유에서 너무나 완벽한 있음은 거의 없음과 같다.<br/>너무 화가 날 때는 도리어 웃음이 나고<br/>안하무인에게는 더 엄중한 경어체로 말하게 되지만<br/>간절한 일 분이 평범한 일 분으로 김빠질 때가<br/>영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고, 우리가 더욱 유연해져야 할 시간이었다.<br/><br/>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게는 더 벼려진 말보다는<br/>흘려듣기 좋은 말이 필요했다.<br/><br/>2021년 9월<br/>이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