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복을 입고 있으면 묘한 사명감이 솟아오른다. 동료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함께 일한다는 것은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일사불란해야 함을 의미한다. 생명을 구하는 공동의 작업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무게감을 느끼게 해준다. 20여 년을 근무한 베테랑 팀장님부터 이제 갓 들어온 나 같은 막내 구조대원까지 함께 몸에 걸치고 있는 주황색 옷의 통일성은 서로의 위험을 나눠 갖고, 사지에서 자신의 생명을 각자에게 의지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졌더라도, 그을음과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더라도, 빠지지 않는 핏물에 절어 있더라도 내가 입은 당근복이 주는 힘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 p.46, 「주황색 제복의 무게」 중에서
자고, 씻으며 지낸 형제와 다름없는 이가 떠났다. 차창 밖의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여기 아까운 젊은 소방관이 세상을 떠났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내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지만,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세상의 모습이 얄미웠다. 그렇게 나는 동료의 죽음을 처음으로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이어지는 교대 시간의 인사가 어쩌면 생의 마지막 인사가 될 수도 있는 소방관의 운명을 직접 경험했다. 나는 그 이후로도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 p.69, 「눈물이 마르지 않던 날」 중에서
내 딸아이가 태어난 후로 아이들이 다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보호받아야 하고 곱게 커나가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방치로 다치고 죽는다. 아니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선택한 것도 아닌 어린 생명이 어른의 괴로움에 동반되어 희생되는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나는 구조 일을 하며 다행히 아이들이 다치고 죽는 현장은 이 사례 이후로 더는 경험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의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아이들의 사고를 지켜본 동료들은 꽤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호소한다.
--- p.117, 「불 속의 어린아이」 중에서
혹시 어떤 출동이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으로는 자살 출동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려는 사람, 칼로 자신의 신체를 위해하려는 사람, 목을 매는 사람 등등 일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든 타인이 죽으려는 또는 죽어있는 현장을 구조대원들은 심심찮게 본다. 목숨을 끊으려는 자와 살려야 하는 구조대원이 대치하는 상황은 서로에게 피를 말리고 살이 떨리는 순간이다. 삶과 죽음의 생생한 현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 p.130, 「살아야 한다」 중에서
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왜 없겠냐마는 그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나에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나의 팀과 동료들이다. 대단한 무언가를 나에게 주지 않아도 된다. 옆에서 숨 쉬고 있어 주는 것만으로 나는 힘을 낼 수 있고,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안도감이 생긴다.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며 피와 살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 위험이 다가온다면 한없이 무기력해지겠지만 그 위험에 빠지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동료들이 있기에 용기 내어 이 일을 할 수 있다. 어쩌면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해 나의 생명을 동료에게 일부분 의지하고 있는 것 같다.
--- p.220, 「동료들」 중에서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어서 뜨거운 불 속이나 위험한 구조현장을 뛰어다니는 소방관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범죄자의 칼이 두렵지 않은 경찰이나 쏟아지는 총알이 무섭지 않은 군인 역시 없을 것이다. 단지 그 일을 하는 것은, 이것이 내 직업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 하는 것, 스스로 주어진 임무이기에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일하다가 다칠 수도 있고 까딱 잘못하면 제 명에 못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이 일이 내 일이기 때문이다.
--- p.270, 「당신의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중에서
생의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이라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본 현장에서 요구조자들의 모습은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뼈와 살이 온전했고, 들숨과 날숨이 코와 입으로 들락거리며 신체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역시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칠 사고의 순간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을 기점으로 죽고 사는 현장 중심에 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은 결코 온전한 신체를 깨끗이 염하고 누워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p.292, 「인생의 마지막 날」 중에서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야 하는 구조대원은 사람과 사람의 이별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죽음은 이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수명이 다해 죽는 것은 그나마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지만, 사고에 의한 죽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려야 한다.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이별을 막아내야 한다. 구조대원이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자 가장 고귀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한 사람을 사지에서 구해냄으로써 그 사람을 아는 많은 사람의 슬픈 이별을 막아낼 수 있기에 소방의 현장은 이별을 막아내는 사투의 현장일 수도 있다.
--- p.307, 「이별하지 않으려 사투를 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