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거나 소그룹으로 모일 때, 또는 주일 예배가 끝나고 주차장에서 마주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대부분 사교 차원에서 그친다. 자신의 말에 큰 영향력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왜 우리의 말에는 능력이 없을까? 우리가 하는 말이 정말 중요하기는 한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가?
--- p.33, 「3장 표면적 공동체_ 격려의 장애물」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나누는 삶을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함께 참예하고, 내주하시는 한 성령을 모시며, 같은 주를 섬기고 같은 명분을 따르며, 같은 말씀에 순종하고 같은 운명을 고대한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 공동의 신앙 유산을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나눔이라는 개념을 너무 값싸게 취급했다. 그래서 오늘날 나눔의 의미는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내보이기로 전락했다.
--- p.55, 「4장 완전한 개방_ 잘못된 해결책」 중에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불편하고 좌절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때로는 화나고 속상할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우리를 부르사, 문제와 실망으로 가득한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라고 하신다. 긴장과 낙심, 염려와 죄책감,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상대방 중심의 격려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안 그런 척하거나 억눌러서는 안된다. 감정 억압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영적으로 성숙해 보일 수도 있지만(그래서 자신과 상대방을 기만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로 온전한 성숙을 촉진하지는 못한다. 억압은 압박감과 기만을 낳는다. 좋지 않은 감정을 부정하는 데 뛰어난 사람은 상대방에게 깊은 격려가 되는 힘 있는 말을 할 수 없다.
--- p.89, 「7장 우리는 언제 자신의 감정을 말해야 하는가」 중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인간적인 관계를(사람들의 용납, 인정, 사랑 등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기로 결심할 때, 나를 옭아매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때만, 나의 동기도 사랑에 성큼 다가선다. 주일 성경공부 시간에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당황할 때, 또는 친한 친구가 문제를 잘못 처리하고 있을 때, 내 말이 사랑에 근거했다면 격려하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 역설을 주목하라. “상대방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하나님 외의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다 우상숭배다. 우상숭배의 뿌리는 잘못된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 p.107-108, 「8장 격려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