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불상입니다. 이후 새로운 불상이나 불교의 흔적은 120년이 지나도록 고구려의 벽화 말고는 보이질 않습니다. 혹자는 중국산이다, 고구려 제작이다, 백제 제작이다, 라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저는 백제가 중국에서 수입했거나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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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불교의 시작은 광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광진구에서 발견된 유물이 두 점 있습니다. 위에 있는 뚝섬 출토 불상과 자양동 언덕 태봉 고구려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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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 역사에서 광진 부근의 전투기록은 400년 전후의 광개토대왕에서 550년 전후 신라 진흥왕, 백제 성왕 대까지 150여 년간 한강 각축전, 600년 전후에서 676년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들, 나당 전쟁 시의 전투, 1010년경 거란 2차 침입 시 노원전투, 1200년대 전반기의 몽골침입, 1593년 3월 임진왜란 때 노원전투, 1908년 의병 한양진격, 1950년 9월 25일 화양리 전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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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보면 광진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말을 키우던 마장(馬場) 지역과 광장동의 나루 지역으로 지금의 영화사에서 내려와 구의사거리를 거쳐 자양한강도서관까지 이르는 개울(구의천)을 기준으로 동서로 지역이 나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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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광진구는 그리 오래된 토박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을축년 대홍수로 거의 모든 가옥이 파괴되고 인명사상도 많이 발생했구요. 100년 정도를 유추해 보아도 광장동에 일부, 구의 사거리 산의동, 구정동 부근, 광진구청 근처 구릉지, 화양동, 능동 일부 말고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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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초 한민당이 본부를 옮겨 간 후 서북학회 회관은 교육 공간이라는 본래 기능을 되찾게 되는데요. 서북회관은 유석창이 설립한 건국의숙을 모태로 ‘조선정치학관’(1946)이 되었다가 ‘정치대학’을 거쳐 1949년 설립 인가를 받은 건국대학의 본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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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전에 자주국을 갈망하던 인사들이 교육을 통해서라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마음이 모여 건물을 지었고, 해방 후 여러 정치가들이 모여서 새로운 조국을 꿈꾸었으며 고려대, 국민대, 단국대, 건국대 등 네 개의 대학을 태동시켰던 건물인 서북학회회관이 광진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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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리 골프장은 1950년대는 미군들이, 5·6 군사 쿠데타이후에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를 위시한 군부세력과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초보 재벌가의 놀이터가 됩니다.
1966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골프를 치는 곳이 되었고요. 배우기는 경복궁에 개인 골프장을 만들어 배웠다고 합니다. 그의 골프 원칙은 네 가지.
1. 퍼팅은 들어가던 말든 한 번만.
2. 내 앞에 골프 치는 사람이 없을 것.
3. 티샷을 잘 못 치면 무조건 다시.
4. 캐디는 클럽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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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인물들로 보자면 고종의 부인들 중 의친왕의 어머니 장(張) 씨의 무덤이 화양동 주민센터 주차장에 있었고, 1884년 임오군란 시 한양을 탈출한 명성황후, 고종의 둘째아들 의친왕 역시 잠시 화양동에 무덤으로 누워 있었으며, 고종의 며느리이자 순종의 부인인 민 씨의 무덤 유강원(裕康園), 왕가의 사유지인 목장지를 골프장으로 줬던 영친왕도 광진과 연관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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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야당을 추구하던 그의 행적으로 가정은 유가족의 말대로 됫박질로 구걸을 해야 했고, 셋집을 옮겨 다녔습니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지인인 구익균의 집 앞마당인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210-10(구 주소: 성동구 구의리 236-6) 한 모퉁이에 건평 11평의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독재에 아부했지만 한때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던 이은상은 비나 피하라는 뜻의 ‘피우정(避雨亭)’이라는 목각 현판을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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