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이 나빠서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요양 생활을 할 때였다. 내가 막 쓰러지기 전에 아내는 중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저축해 놓은 돈으로 살림을 해야 했다. 병간호에 열심이던 아내는 날이 갈수록 푸념이 늘었다. (...)
어느 날 아내가 외출을 했는데, 점심을 챙겨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싱크대에서 설거짓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 딴에는 아내를 도와주겠다고 신나게 설거지를 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신문을 읽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돌아왔다. 옷도 갈아 입기 전에 부엌에 들어간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누가 설거지 해 놓으랬어?"
나는 깜짝 놀라 부랴부랴 부엌으로 달려갔다.
"미안해, 여보.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아내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내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릇들을 소리나게 정리하면서 말했다.
"놔 둬! 이런 건 내가 한다고, 내 할 일이야!"
그날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와주려고 한 일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화를 내는 건지, 내 상식으로는 아내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아내의 고함이 마치 내 무능력함을 탓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아내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다른 게 아니었다. 아내의 살림 투정은 내겐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좀처럼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울 난방비며 물과 전기 아껴 쓰는 문제로 얼마나 다투었는지 모른다. 나는 늘 넉넉히 쓰자는 쪽이었고 아내는 아낄수 있는 대로 아껴야 하다는 쪽이었다. 때로는 이 문제로 심각하게 냉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살림을 하는 아내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생활비가 형편없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속으로 나는 '어디 두고 봐라, 내가 돈 벌어다 주면 될 것 아냐' 하고 앙다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아냈다. 상황보다 훨씬 더 크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상처라는 것을 말이다. 아내는 그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나를 더 신뢰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아내에게 무책임하게 군 적도 없었고, 내 병이 불치병도 아닌 다음에야 아내가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경제적인 문제에 예민하게 굴엇던 것은 장인어른에게서 받았던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경제적을 무능력했던 아내의 아버지, 바람기가 있어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그래서 다섯 자매를 키우기 위해서 몸을 돌볼 틈도없이 고생하셨던 어머니, 시집 와서도 친정을 도와야 했던 장녀로서의 부담감. 어쩌면 아내는 그날 어머니의 고통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되는 듯한 아픔을 겼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이 닿고 보니 하루 종일 가게를 알아보러 다녔을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았다.
--- p. 55~57
자녀들이 자라날수록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은 아버지가 늘 의인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사랑이라서 늘 실수한다는 것을 자녀들은 잘 알고 있다.
--- p. 173
나는 여주교도소 아버지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여러분은 들킨 죄인이어서 여기 교도소 안에 있지만, 저는 안 들킨 죄인이어서 밖에 있을 뿐입니다. 저도 늘 죄를 짓지요. 저는 큰 죄인입니다. 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제 안에 있는 죄성을 발견하고 제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에 저는 제가 죄를 져서 죄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송 때문에 습관처럼 죄를 짓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입었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 그분의 보혈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진짜 죄라는 것을 아십니까? 가장 무서운 죄는 어쩌면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 p. 19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