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레이만의 치세는 쟁쟁한 군주들이 힘의 경합을 벌이는 시기와 우연히 일치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이기도 했다)와 펠리페 2세,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와 그의 아들 앙리 2세,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모스크바 대공 겸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선포된 폭군 이반 4세, 이란(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인도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그들이었다. 그들 모두 제국 적 사명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도도한 자긍심을 지닌 기라성 같은 군주들이었다. --- p.27
투르크군이 격퇴된 소식은 지중해 일대로도 소리 소문 없이 퍼져나갔다. 유럽 군주들은 실질적으로 도와준 것은 없었으나 로도스 섬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섬은 오스만 제국의 해상 진출을 막아주는 댐 같은 존재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에스파냐 국왕)도 로도스 섬을 잃으면 지중해가 뚫려 오스만 제국이 해로를 통해 이탈리아 침공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기독교계도 파멸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 p.47
바르바로사 형제가 명성과 악명을 떨침에 따라 그들의 전설도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루지는 불같은 성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 땅딸막한 키에 강인한 체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수염과 머리털이 붉고 오른쪽 귀에 금귀고리를 한 그는 경외감이 느껴지는 대장부였다. 마그레브 지역의 구술역사와 시, 그리고 핍박받는 에스파냐의 무슬림들 사이에 그는 신통력을 지닌 이슬람판 로빈 후드로 알려져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한도 끝도 없는 능력을 지녔고,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 힘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며, 악마와 맺은 협정으로 타고 다니는 배도 사람 눈에 뜨이지 않았다고 한다. 소문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소름끼치는 괴담까지 생겨났다. 아루지가 이빨로 기독교도의 목을 찢었고 혀를 먹었으며, 언월도로 사람을 50명이나 죽였고, 구호기사단의 기사 머리를 밧줄로 묶어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공처럼 빙빙 돌렸다는 것이다. 에스파냐와 남부 이탈리아 지역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말할 때면 성호를 그었다. --- pp.66-67
그와 더불어 카를로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방어 계획도 수립했다. 로도스 섬이 함락된 뒤 구호기사단은 지중해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릴라당은 유럽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성전을 계속할 수 있는 근거지를 제공해줄 것을 청원했다. 그 과정에서 런던의 헨리 8세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고 대포를 지원받기도 했으나 영속적인 근거지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카를로스가 제공해준 것이다. 카를로스는, 해적들이 이탈리아 해안을 공격할 때면 반드시 거쳐가는 시칠리아 섬 남쪽에 위치한 황량하고 메마른 몰타 섬을 구호기사단에게 선사했다. 그렇다고 거저 준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스는 대가 없는 선물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몰타 섬을 주는 대가로 바르바리 해안가의 트리폴리에 있는 그의 요새를 방어해줄 것을 요청했다. --- p.90
카를로스가 바르바로사에 맞서 원정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구 반대편에서 굴러 들어온 횡재 덕분이었다. 1533년 8월 29일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안데스 고지의 카하마르카에서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 아타우알파를 교살하고, 그가 몸값으로 제안한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탈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에스파냐의 겔리온 선들은 “투르크 황제, 마르틴 루터, 기독교의 다른 모든 적들에 맞서 성전”을 벌일 수 있도록 120만 두카트의 남아메리카 황금을 카를로스에게 연신 실어다주었다. 아타우알파의 보물창고가 카를로스 십자군의 전주 노릇을 한 것이다. 신세계가 구세계의 형세를 변화시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p.108
구호기사단만이 노예무역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규모이기는 해도 기독교 해적들 또한 지중해 동부 해역에서 노예사냥을 했다.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레그혼)와 나폴리 해안에는 노예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무슬림 노예들도 몰타 섬의 노예 우리로 끌려가거나 혹은 교황 갤리선의 노잡이로 일했다. ……1550년 말 쉴레이만은 후마라는 여성으로부터 메카로 순례여행을 가다 구호기사단에게 납치된 자식들을 찾아달라는 눈물 어린 탄원 공세를 받았다. 그녀의 두 딸은 프랑스로 유괴돼 기독교로 개종한 뒤 현지 남성들과 결혼했다. 그런데도 후마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술탄을 만나 탄원해야 한다며 이스탄불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그녀의 두 딸이 납치된 지 24년이 지난 뒤에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3세는 여전히 "후마라는 여인은 지금도 궁정에 계속 탄원서를 보내고 있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녀의 두 딸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네들의 남자형제도 십중팔구 ?타 섬 갤리선의 노잡이로 일하다 죽었을 것이다. 기독교계와 이슬람계에서는 실종과 납치가 난무하는 그런 소소한 비극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 pp.143-144
조그만 요새 성 엘모를 차지하기 위한 공방전은 나날이 격화되었다. 그것은 화약의 시대에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무기들이 총동원된 전투였다. 투르크군은 물론 가공할 궁수부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이용했지만 요새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온통 아마겟돈을 방불케 하는 폭발음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한 발의 총탄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고 철구 하나로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저격과 포격이 난무하는 전쟁이었으나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또 성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백병전, 교묘하게 만들어진 소규모 방화기기들이 활발하게 작용한 전쟁이기도 했다. 기독교군은 원시적 수제 수류탄, 화염방사기, 그리스의 불, 역청, 선회포, 비둘기 알 만 한 돌을 발사하는 대구경 화승총, 밀집부대를 죽이는데 효과적인 사슬탄을 이용했다. 투르크 군도 그에 맞서 터지면 끈끈이 불이 터지는 작탄炸彈을 중무장 군대에 던졌다. 그러나 그 모든 무기들은 아직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한, 따라서 불안정하고 조잡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용 중에 위험한 일도 곧잘 발생했다. 몰타 섬 공방전 기록을 보면 그런 무기를 다루다 변을 당한 병사들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 pp.230-231
이 책의 저자 로저 크롤리는 16세기에 일어난 지중해 전쟁을 진정한 의미의 ‘문명 충돌’로 규정한다. 이슬람계와 기독교계가 세계의 중심 지중해에서 영토, 패권, 종교를 놓고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는 의미에서다. 그런가 하면 지중해 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가 황제들의 자존심을 건 일전이었으며, 신?구식 무기들이 경합을 벌인 전쟁이었고, 해적과 제독들의 지략 싸움이었으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었고, 무제한적으로 재원이 투여된 총력전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중해는 전 유럽의 시선을 사로잡은 서사적 전쟁의 무대가 되고, 물과 불과 피가 튀는 아비규환의 바다가 되고, 흥미진진한 무용담의 원천이 되었다. 지중해 전쟁 중에서도 특히 레판토 해전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살라미스 해전, 로마의 분열을 막아준 저 악티움 해전, 영국의 해군력으로 승승장구하는 나폴레옹의 기세를 꺾은 트라팔가르 해전과 더불어 기독교계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기념비적 사건이었고, 이슬람계에는 충격의 일패를 당한, 그리하여 세력이 꺾이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였다. 그로써 한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 pp.518-519,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