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한 네 가지 컵은 주로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중고가 아니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다. 유구하게 양도되어온 거다. 어느 개인의 역사가 만난 적 없는 타인에게로, 어느 테이블의 역사가 다른 테이블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이 좋다. 그곳에 담겼을 수많은 이야기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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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시간이 제한된 세계에서 물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매개가 된다. 엎질러진 시절을 다시 통과하게 되고 먼 타인과 나의 생활이 포개어진다. 아주 작은 물건을 손에 쥐면서.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 애호의 역사를 나누며 유대감이 시작되기도 한다. 여러 공동체가 그런 방식으로 태어났다. 어쩌면 다른 나라에서 출발했을 전통 같은 데까지 함께 가면서. 재화 가치에 관계없이 유효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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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물건은 거의 항상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비싸거나 너무 많이 비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근마켓이라는 두 번째 거래의 장이 있다. 내향적이라 이틀 동안 집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사람을 걷게 만들고, 그런 개인과 개인이 만나 느슨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곳.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컵을 쥐며 생경한 대륙의 식탁이 궁금해지는 곳 말이다. 이 교환장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까. 시간은 유한하고 생활의 촉매는 세상에 많고 우리의 욕망은 계속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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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낭독회는 외진 곳에 자리한 작은 서점에서 예정되었고 모객 기간이 길지 않았다. 정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명이라니. 그의 시집을 아끼고 좋아해 여러 사람에게 선물한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어쩌면 나 스스로를 향하던 어느 날의 번뇌를 거기서 보아버렸는지도. 자신의 세계를 움직여 먼 곳까지 와준 한 사람 한 사람을 환대하는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장의 수요보다 백 배만큼 내어줄 준비가 된 시인이. 실로 그는 웃으며 낭독회를 잘했을 것이다. 그것은 시장이 기억하지 않을 공급 방식이었다. 이후에도 그날의 대화를 자주 생각한다. 삶 앞에서 꼿꼿한 고개를, 스스로의 일을 존중해주고 자신을 작게 만들지 않는 자세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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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위해 시작한 몇 안 되는 행위다. 일일이 설명 안 해도 성립되는 세계를 갖고 싶었다. 이민자로 지내는 동안 언어 앞에서 자꾸 실패하는 기분이었다. 발음되지 않는 것, 들어도 소리 이상의 의미로 들리지 않는 것들 사이로 매일, 찢어진 낙하산처럼 떨어졌다. 그럴수록 모국어와 타국어 사이 틈의 말을 찾아서, 나만 아는 방법으로,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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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위기에 처한 물건들 또한 한 번 더 기회를 얻고 중고 시장에 서 있다. 재고되기 위해. 거기서 마지막으로 새로워질 기회를 얻는다. 모든 미물은 새로워지고 싶다. 나에게 더는 필요하지 않은 소유가 누군가에게는 기다려온 바로 그 물건일 수 있다. 꼭 팔아야 하는 사정과 마침 그걸 찾던 손이 만날 수도 있다. 고맙잖나,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는 감각은. 비슷하게 간절한 사람들이 만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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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에 대해 그는 빠삭했다. 그 덕분에 퍼즐에 색이 많을수록 맞추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림 속 대상을 색으로 구분하는 것만으로 자리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도. 의뢰한 퍼즐은 하필 나무랑 잔디밭이 전부 녹색 계열이어서 피스를 일일이 하나씩 다 대봐야 했을 거다. 낯선 골목과 모르는 집 앞을 서성이듯, 퍼즐 조각의 끄트머리와 끄트머리를 일일이 맞대보아야만 확신할 수 있었을 거다. 사람을 찾던 시절에 꼭 맞는 비유다. 나와 어울리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돌출된 나와 움푹한 자신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이후에도 나와 타인은 동시에 탐구되었다. 끄트머리와 끄트머리를 일일이 맞대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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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당근마켓은 판매자뿐 아니라 구매자에게도 똑같이 거울을 쥐여준다. 양쪽 다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거울이 비춰온 오래된 풍경을 새로 만나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볼 수 있다. 거기, 매너 온도 밑에 상세한 언어로 우리는 남는다. 지난 태도를 조회할 수 있게 하자 사람들은 친절해졌다. 배려도 했다. 부탁한 적 없는 초콜릿이나 과자를 주기도 하고, 거래 장소로 와주기도 하고, 여분의 물건을 얹어주기도 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무료로 나누기도 했다. 거울은 평판으로 이어졌다. 익명의 공간에서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매무새를 다듬게 하는 아름다운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닉네임이라는 잠정적 호칭 너머에서도 품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웹이라는 광활한 도시에서 서로를 자신과 다름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했다. 활자와 이미지로 빼곡한 SNS에서, 중고 거래의 장에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일 동안 당신은 얼마큼 당신인가.
--- p.58-59
시간은 폐기하게 하는 성질이 있다. 대부분의 물건은 망가지거나 구석에 처박히거나 낡아 버려진다. 당장 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물건은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상태다. 그렇게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이사 가는 날 빈집 앞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존재가 망각되는 것은 필요의 감각을 잃는 것. 오래된 물건 대부분은 그렇게 시간에 휩쓸려 가고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 p.65-66
나의 동네는 어디까지일까. 무엇이 나와 이웃의 공통의 반경을 만드는 걸까. 당근마켓에는 ‘동네생활’ 이라는 게시판이 있다. 어떤 날은 여기 게시물을 읽다가 하루가 다 가버린다. 처음 둘러볼 땐 1990년대 이웃들이 전부 인터넷으로 공간을 옮겨 거기 사는 줄 알았다. 만난 적 없지만 가까이 거주하는 이들이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를 만날 준비가 된 것처럼, 그렇지만 친구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사람의 선의를 아직 능동적으로 믿는 것처럼. 아직도 이런 데가 있다니.
--- p.83-84
오랫동안 내가 컵을 애호해온 건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어서다. 사용할 때마다 입에 닿는 물건 아닌가. 우리는 매일 몸으로 우리 아닌 것들을 들인다. 몸에 무언가를 들이는 행위만큼 내밀한 게 있나. 이야기 또한 입에서 시작된다. 입을 떠난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통과하며 새로워지고 생명을 얻거나 시든다. 이야기의 속도와 호흡, 동원되는 단어, 이야기가 멈추는 자리. 이야기 안에서는 우리를 들킬 수밖에 없다.
---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