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황현은 『매천야록』을 남겨 지금도 그의 굳건했던 역사의식을 느끼게 해 줍니다.
--- p.17
일제가 이처럼 출판을 탄압했지만, 출판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서적들을 다수 출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서적들이 발매 금지 및 압수당했습니다. 말하자면 ‘금서’가 된 것입니다.
--- p.28
1920년대에는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문화정치로 정책 기조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제가 표면상 내건 명분입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 병력을 1910년대보다 더 증원하여 실제적으로는 경찰에 의한 통치 활동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그래도 신문과 문화 사업은 물꼬가 트여 출판 활동도 1920년 이후 서서히 활기를 띠게 됩니다.
--- p.37
이 시기는 또한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농촌 계몽과 한글 보급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동의 주역은 학생이었지요. 가난한 약소국으로 언론이 통제되는 식민지 치하에서 살았던 학생들이 이룩한 의미있는 활동이었습니다.
--- p.55
소설 읽기는 조선시대 사대부 선비들에게는 금기시되었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 근대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게 소설은 근대적 교양을 쌓고 예술적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매개체였습니다.
--- p.60
소설 외에 이광수가 펴낸 연애 서간집인 『춘원서간문집』까지도 소설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올려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기록했으니, 일제강점기의 독서시장은 가히 이광수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 p.66
『무정』은 신문에 연재되는 동안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이광수라는 이름을 사회에 널리 알리게 해주었습니다. 출판사는 그러한 인기를 놓치지 않고 연재 후 곧바로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신문, 잡지 등에 책광고를 계속 실어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혔습니다.
--- p.76
해방되기 직전, 광복군이었던 장준하, 김준엽 선생 등은 서울에 침투하여 일본 군대를 몰아내는 작전에 연합군 특공대의 일원으로 투입되는 훈련을 받았지만, 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해방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해방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 p.85
이처럼 해방 직후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저술들이 많이 나온 것은 민족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를 인간 존재와 인간 세계의 근거로 인식한 것입니다. 민족 언어는 민족 존재의 기반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킨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기반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p.104
제1공화국 정부가 내세운 반일주의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적을 벌였던 인사들이 제1공화국의 정치,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부를 장악했으면서도 내세우는 구호나 검열의 기준으로 반공과 함께 반일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 p.111
책뿐만 아니라 잡지도 널리 읽혔습니다. 더욱이 피난지에서 잡지 창간도 이루어졌는데, 전쟁 중의 일시적인 읽을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전후에도 계속 발행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잡지문화사의 소중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는 잡지들이 새롭게 등장한 것입니다.
--- p.114
나아가, 많은 시인 지망생들은 이러한 한하운의 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시인 고은은 “중학 시절 길 위에서 누군가 분실한 것으로 보이는 『한하운 시초』를 주워 읽고 감동하여 울며 막연히 시인으로서의 길을 다짐하게 되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 p.124
5·16 이전이나 이후나 한국은 미국 원조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가난한 나라였지만, 출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지난 번 이야기했듯이, 6·25전쟁 중에도 피난지에서 서적 발행을 멈추지 않았고 새롭게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 p.135
그런데, 출판시장이 1960년대 내내 전집을 중심으로 확대되어가자 유사한 전집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당시는 우리가 세계저작권조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 작품의 중복 출판이나 모방 출판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 p.141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단위는 1970년대에 더욱 커졌고, 1980년대에는 드디어 100만 부를 넘어서는 밀리언셀러가 등장하게 됩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밀리언이 아니라 1,000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다수 나오고 있습니다.
--- p.148
저자 자신이 책의 서문을 출판사에 넘기고 잠시 외국에 다녀왔더니, 유명해져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그가 바로 전년도에 펴낸 『고독이라는 병』도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지만, 이 책의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교수였던 김형석은 책의 인세로 집도 장만하고 6남매도 잘 키웠다고 할 정도입니다.
--- p.163
그 탄압의 양상을 보면, 시위에 앞장섰던 학생과 지식인들을 감옥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교수나 언론인들을 그들의 일터에서 쫓아냈습니다. 직장에서 밀려난 해직 교수와 해직 언론인들이 점차 출판계로 몰려들면서 출판계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지요.
--- p.179
한글이 창제된 것이 조선시대 전기인 1443년인데, 1970년대에 와서야 한글세대가 등장했다니, 우리 역사의 비극입니다.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하층 민중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지만, 수백 년 동안 한글은 공용어가 될 수 없었습니다.
--- p.185
당시 《사상계》 신인문학상은 신문사 공모 신춘문예보다 경쟁이 더 치열했다고 합니다. 황석영의 작품을 본 심사위원들은 작품 분위기가 원숙하여 40대의 중년이 쓴 것으로 알았는데, 시상식장에 어린 고교생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 p.215
그런데, 1985년 나온 『넘어넘어』의 원고는 5·18 참여자들과 목격자들에 대한 방대한 취재와 기록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후 명목상 집필 책임을 져줄 사람과 출판사를 물색합니다. 책이 나오면 집필자와 출판사 대표는 모두 구속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요.
---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