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는 너와 나의,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산골에서 태어나 자연을 누비던 유년이 있어서, 속주머니에서 끄집어낼 추억의 음식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음식 만드는 일, 글 쓰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약식동원藥食同原’, 음식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먹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예부터 먹어온 음식과 퓨전 음식, 음식의 효능과 성질, 음식궁합과 동용금기, 음식에 얽힌 야사와 전해오는 이야기 등은 양파 까듯이 맵고 달곰하며 새롭습니다.
---「머리말」중에서
검은빛의 감자 농마 송편은 우리 집에서만 맛볼 수 있었다. 이웃들은 별식을 먹으러 들르곤 했다. 회색빛 농마를 익반죽하여 팥소를 듬뿍 넣은 후 꾹꾹 두어 번만 움켜쥐면 송편이 만들어졌다. 할머니표 북한식 감자 송편은 크기도 만만찮았다. “한 개를 먹어도 큼직한 게 좋니라.” 쪄낸 송편은 색깔이 검었다. 색감도 그렇거니와 너무 질깃한 식감이 어린 입맛에는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달짝지근한 팥소만 골라 먹고 나면 가죽 부대처럼 껍질만 동그마니 남았다.
농마 송편이 굳기 시작하면 조개가 아가리 벌리듯 떡떡 갈라졌다. 볼품없는 모양의 떡을, 손주들이 먹다 남긴 것을 할머니는 알뜰하게 드셨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친정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고향 음식으로 달랬으리라. (중략)
특히 햇감자가 한창일 때는 날마다 감자를 쪄주었다. 햇감자는 옹자배기에서 몇 번만 굴리고 주무르면 이내 연한 껍질이 훌러덩 벗겨졌다. 가마솥에 감자를 안치고 사카린과 약간의 소금을 넣은 후, 감자밭 고랑에 드문드문 심었던 완두콩을 넣었다. 분이 하얀 감자를 툭툭 으깨어 밥그릇에 담아주던 할머니….
---「할머니가 쪄준 감자」중에서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외가에 들렀다. 개학이 가까워 오자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자전거를 타고 이십여 리 길을 달려서 나를 데리러 왔다. 외할머니는 고추장에 박은 무장아찌를 양은 주전자에 꼭꼭 눌러 담아서 건네주었다. 자전거 앞자리에 앉아서 한 방향으로 다리를 모았다. 비탈길에 자전거가 덜컹거리자 내 손에 힘이 쏠렸다. 자전거핸들이 마구 휘청거렸다. 큰오빠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며 다시 자리 배정에 나섰고, 뒷좌석으로 밀려난 나는 장아찌 담긴 주전자를 들어야 했다.
울퉁불퉁 산비탈을 지나고 큰길로 들어서자 큰오빠는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앵무동 초입의 너른 밭에서 옥수수 꺾는 어른들 목소리가 두런두런 스쳤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걸려 자전거는 튀어 올랐고 나도 튀어 올랐다. 분명한 것은 주전자는 꽉 쥐고 있었는데 오빠의 옷자락을 놓쳐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방에 누워 있었다. 오빠들은 막냇동생이 길바닥에 떨어진 줄도 모른 채 곧장 달렸고 옥수수를 꺾던 동네 어른들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챙겼단다. 찌그러진 주전자에서 쏟아진 고추장으로 범벅이 된 ‘노 씨네 막내딸’이 큰 사고를 당했다고 동네가 술렁거렸다. 자전거 사고로 앞니가 몇 개 빠진 나는 그 좋아하던 옥수수를 먹지 못했다.
---「한여름의 추억, 옥수수」중에서
원추리를 우리말로는 ‘근심풀이풀’이라고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초로 알려져 있다. 사람과 헤어질 때는 작약을 선물하고, 먼 곳에 가는 사람을 빨리 돌아오게 하고 싶을 때는 당귀를 선물하며, 근심을 잊으라고 원초를 선물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모란꽃을 즐기다가 ‘오직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하고 모란꽃은 술을 더욱 잘 깨게 한다’라는 시를 읊었을 정도였다.
옛날, 형제가 한꺼번에 부모를 여의었다. 형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모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고, 동생은 부모님을 잊지 않으려고 난초를 심었다. 형은 슬픔을 잊고 열심히 일했지만, 동생은 슬픔이 더욱 깊어져서 병이 되었다. 어느 날 동생 꿈에 부모님이 나타나 말했다. “사람은 슬픔을 잊을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너도 원추리를 심고 우리를 잊어다오.” 동생도 부모님무덤가에 원추리를 심고 슬픔을 잊었다고 한다.
원추리는 성질이 서늘하고 맛이 달다. 산야초는 대개 독특한 향과 쌉싸래한 맛을 가지고 있는데, 원추리는 별다른 향이 없다. 반면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원추리는 생으로 먹지 말고 데쳐서 먹어야 자체 독성을 제거할 수 있다.
겨울이 가는지 봄이 오는지도 모른 채 한동안 정신을 놓고 지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러 시골로 달렸고, 병원에 모셔두고 마음 아파했다. 병원에서 열하루를 보낸 어머니는 떠나셨다. 조부모님과 아버지까지 다 모시고 가겠노라며, 파묘하여 화장해서 같이 흙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다. 고운 가루가 된 엄마의 흔적은 따뜻했다. 눈물로 얼룩진 하늘을 보았다. 하늘빛은 푸르다 못해 시리고 아렸다. 햇살이 날개처럼 활짝 펼쳐진 하늘길을 따라 어머니는 훨훨 떠나셨다.
삶터로 돌아온 날, 마당 가에 원추리 새순이 쏙쏙 올라오고 있었다. 어린 날, 종다래끼 들고 양지바른 구시벌 봇도랑 가에서 원추리를 뜯었다. 원추리는 금세 종다래끼를 채웠다. 봄바람이 까슬했으나 어머니가 데쳐서 무쳐준 그 다디단 나물이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게 좋았다. 장과 기름을 넣어 조물거리면 한 접시 반찬이 차려졌다.
---「그리운 어머니, 원추리」중에서
우리는 흔히 도루묵의 어원을 선조 임금과 결합한다. 임금은 피란지에서 맛있게 먹은 물고기 ‘묵’에게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후에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 보았더니 옛날의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도루묵은 동해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선조의 피란길에는 도루묵을 먹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전한다. 허균의 전국팔도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엮는 『도문대작』에 ‘은어’가 나온다. “동해에서 나는 생선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목어木魚’였는데 전 왕조에 이 생선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이름을 ‘은어’라고 고쳤다가 너무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라고 고쳐 ‘환목어還木魚’라고 했다.”
조선 시대 이의봉이 편찬한 『고금석림』에 따르면 “고려의 왕이 동천東遷하였을 때 목어를 드신 뒤 맛이 있다 하여 은어로 고쳐 부르라고 하였다. 환도 후 그 맛이 그리워 다시 먹었을 때 맛이 없어 다시 목어로 바꾸라 하여, 도로목[還木]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자어 ‘환목어’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바로 ‘도루묵’이며, 기록을 살펴볼 때 도루묵 이야기는 고려 때의 왕과 연결해야 한다.
그런데 왜 도루묵은 선조 임금 옆에 끼여서 희생물이 되었을까. 선조 임금은 피란을 떠난 것도 부족해 망명까지 시도하였다.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은 임금에 대해 원망을 했을 것이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온’ 왕을 애꿎게 도루묵 이야기와 연결 지은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겨울철 생선 도루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