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임의의 주어진 명제들을 분석하려고 시도한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이 더 단순한 명제들의 논리적 합이거나 곱, 또는 다른 진리 함수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이 충분히 수행된다면, 그것은 그 자신들은 더 단순한 명제적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명제적 형식들에 도달하는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결국 항들의 궁극적 연관에, 즉 명제적 형식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는 쪼갤 수 없는 직접적인 연관에 도달해야 한다.
---「논리학 형식에 관한 몇 가지 소견」중에서
나는 질에 정도를 부여하는 진술은 더 분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욱이, 정도 차이의 관계는 내적 관계이고, 따라서 그것은 상이한 정도들을 부여하는 진술들 사이의 내적 관계에 의해 묘사된다고 주장한다. 즉, 원자적 진술은 그것이 부여하는 정도와 같은 다수성을 지녀야 하고, 그런 까닭에 원자적 명제들의 구조에는 수가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논리학 형식에 관한 몇 가지 소견」중에서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에 관한 탐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모든 문구들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윤리학이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대충의 관념을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윤리학에 관한 강의」중에서
어떤 사람이‘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발견했다고 믿고, 이제 모든 것은 아주 쉽다고 자신에게 말하고자 한다면,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하기만 하면 자신이 반박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해결’이 발견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음이 틀림없고, 그 시대에 비추어 보면 그 발견된 해결은 우연처럼 보인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는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중에서
상이한 두 식물 종류 A와 B를 상상하라. 그 둘로부터 씨앗들이 얻어진다. 그리고 그 두 종류의 씨앗은 전적으로 같게 보이며, 가장 정확한 탐구라도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식물-A의 씨앗들로부터는 다시 식물-A들이 나오고, 식물-B의 씨앗들로부터는 식물-B들이 나온다. 이러한 씨알 하나로부터 어떤 종류의 식물이 생길지는, 그것이 어느 식물로부터 나왔는지를 우리가 알 경우에만 예언할 수 있다. (중략) ”그 씨앗들 자체 속에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식물들을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의 전사(前史)만으로는, 그 전사가 씨앗 자체 내에 흔적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들의 더 이상의 발전의 원인일 수 없다.”
---「원인과 결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