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확실성은 개인적 자아의 의식을 분석해 들어가서 얻어지는 어떤 하나의 원리이자 나머지 앎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일의 앎 또는 앎의 불변적 패러다임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확실성은 앎의 놀이를 포함한 언어놀이들의 토대이기는 하지만 앎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명시적으로 의식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다수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며, 사회적으로 성취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황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는 것들이다.
--- p.12~13, 「옮긴이의 말」 중에서
144. 어린아이는 수많은 것들을 믿는 법을 배운다. 즉, 아이는 예컨대 이 믿음에 따라 행위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가 믿는 것들의 체계가 점차 형성되어 나타나며, 그 속에서 어떤 것들은 요지부동으로 확고하고 어떤 것들은 다소간에 움직일 수 있다. 확고한 것이 확고하게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명백하거나 명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 p.53, 「확실성에 관하여」 중에서
206.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러나 그것은 참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근거들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근거도 댈 수 없지만, 당신이 좀 더 배운다면 당신도 역시 같은 의견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예컨대 역사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 p.65, 「확실성에 관하여」 중에서
469. 대화 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앞뒤 맥락도 없이“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 하고 말한다. 나는 놀란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이 말이 나에 관한 그의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제 그 말은 나에게 더는 뜻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 p.122, 「확실성에 관하여」 중에서
601. 언제나 실천을 생각하는 대신, 표현 및 표현을 사용하는 우리들의 기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의미를 인식하고자 하는 위험이 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표현을 그렇게 자주 읊조려 본다. 왜냐하면 마치 우리들은 우리들이 찾던 것을 표현에서, 그리고 우리들이 지니는 느낌에서 보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 p.152, 「확실성에 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