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단한 소설가가 아닙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다.
“거장들과 비교하면 나란 존재는 하찮죠. 나도 언젠가는 정말 대단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희망은 오래전에 접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인정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나는 정말 노력합니다. 허술한 건 어느 하나 지나치지 못하죠. 나도 좋은 이야기를 말할 수 있고 그럴듯한 인물을 창조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 p.21
이 신분이 높은 사람들, 매사 일처리가 유능하고 신중하며 옷차림이 깔끔한 아내, 그가 살아가는 우아한 환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모험을 감행한 젊은 시절을 후회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을까, 아니면 못 견디게 지루한데 예의상 즐거운 척 체면을 차리는 걸까?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들었다. 그의 시선은 생각에 잠긴 눈빛, 온화하면서도 묘하게 분석하는 듯한 눈빛을 담고 잠시 내게 머물렀다. 별안간 그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 p.71
그녀는 생기가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열정적으로 재잘거렸고, 반짝거리는 눈에는 언제나 황홀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나는 왠지 그 미소가 좋았다. 조금은 능청스러운 미소라고나 할까. 능청스럽다는 말에서 불쾌한 측면을 뺄 수 있다면 말이다. 능청스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미소였다. 어쩐지 짓궂은 미소였다. 말썽을 피우는 줄 알면서도 재미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아이, 큰 말썽이 날 리 없다는 걸 알고 금세 들키지 않으면 스스로 그것을 털어놓는 아이의 미소였다.
--- p.82
평론가는 형편없는 작가에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고 세상은 전혀 가치 없는 자에게 열광할 수 있지만 두 경우 모두 오래가지는 못한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상당한 재능 없이 에드워드 드리필드처럼 오랫동안 대중을 사로잡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선택된 자들은 대중성을 비웃는다. 그들은 대중성을 평범함의 증거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후대 사람들의 선택이 한 시대의 무명작가들이 아니라 유명한 작가들 중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불후의 명작이 언론의 외면 속에 사장되는 일이 계속되어 왔을지 몰라도 후대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 길이 없다.
--- p.138
“그 집 양반은 자주 만났어요.” 브렌트퍼드 씨가 말했다.
“그 양반이 여기 들러 흑맥주를 한 잔씩 하는 걸 아주 좋아했거든요. 퍼마신 건 아니고 그저 바에 앉아 얘기하는 걸 좋아했지요. 세상에, 한번 말을 시작하면 한 시간이고, 상대도 가리지 않았어요. 드리필드 부인은 그 양반이 여기 오는 걸 아주 싫어했어요. (.……) 발이 벽 몰딩에 닿는 느낌이 좋다면서. 자기는 바가 좋다고 늘 말했어요. 거기
서는 인생이 보인다고. 그리고 자기는 늘 인생을 사랑했다고.”
--- pp.256-257
“그 여자라면 바턴 트래퍼드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아. 악담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만 썩 좋은 여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건 오해야.” 내가 대꾸했다. “정말 좋은 여자였어. 나는 그 여자가 성질을 부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다 들어주는 여자였어. 누구의 험담 한 번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네.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었어.” (.……)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아주 단순한 여자였어요. 건강하고 천진한 본능을 가진 여자 말입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죠. 사랑을 사랑했어요.”
--- pp.273-274
작가를 흔드는 인간들은 수두룩하다. 인터뷰를 하려는 신문 기자들,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들, 원고를 달라는 편집자들, 소득세를 긁어 가는 세금 징수원들, 오찬을 같이 하자는 귀하신 몸들, 강연을 부탁하는 협회 국장들,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들, 이혼하겠다는 여자들, 사인해 달라는 젊은이들, 배역을 달라는 배우들, 생판 남인데 돈을 빌려 달라는 사람들, 감정이 북받쳐 부부 문제를 상의하려는 부인네들, 자기 작품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진지한 청년들, 대리인들, 출판업자들, 관리인들, 따분한 인간들, 팬들, 평론가들, 그리고 작가 본인의 양심. 하지만 작가는 한 가지 보상을 얻는다. 뭔가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면 괴로운 기억, 친구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슬픔, 짝사랑, 상처받은 자존심, 배은망덕한 인간에 대한 분노, 어떤 감정이든, 어떤 번뇌든 그저 글로 풀어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걸 소설의 주제로, 수필의 소재로 활용하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다. 작가는 유일한 자유인이다.
--- pp.294-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