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 시대 이집트의 결혼에서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경제적 교환이라기 보다는 가족의 기억을 보존하는 세대를 잇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우자의 선택은 집단의 일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일이었다.
BC 3세기의 민간에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된 한 사료에는 당시 화제가 된 파라오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족외혼을 통해 복수의 인척 관계를 형성하기를 바라던 왕의 의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자 형제와 결혼하기 위해 딸과 그 어머니가 마침내 파라오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사랑과 관습이 정치적 목적을 누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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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낌 없이 그리스 법률을 위반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우, 당시 알렉산드리아를 다스렸던 열 네 명의 통치자들 가운데 여덟 명이 자신의 누이들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적 개인적 외교적인 이유를 고려하여 그러한 결혼을 했을 분, 그 어느 경우도 암묵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왕조의 법률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 pp.196~197
가족 구성의 특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한 사회가 택한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혼의 엄숙성, 업무의 분담, 성관계에 대한 규제, 아이의 출산 그 어떤 것도 자연적인 제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결혼에 의한 결합 역시 매우 가까운 친족사이, 즉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형제 자매 사이에서 형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폐쇄적이며 이웃 집단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일련의 혈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엇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여자의 소유를 둘러싸고 폭력적인 대립관계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구학적인 불균형이 어느 한 집단에서 발생할 때마다 그 집단은 무력, 즉 전쟁을 통해서만 부족한 배우자를 수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안정적인 사회 형태도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보편적인 금지는 결혼을 통한 배우자 교환, 성관계의 규제,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의 보전과 연관되어 있다. 즉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두 가족이 없었다면 결혼을 통한 세 번째 가족이 없었을 것이고 사실상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모든 가족의 시초가 되는 결혼은 그 결혼이 두 교환 집단의 관계를 맺어준다는 사실에서 합법성을 얻는다.
--- pp.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