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썬 흥행에 핵심에는 승리가 있다. 그리고 이 ‘승리’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세 종류의 여성들이 만들었다. 여성 팬, 살아 있는 여자, 그리고 죽은 여자. (린사모로 대표되는) 아시아 금융 자본과 (전원산업으로 대표되는) 강남 부동산 자본이 한류 스타 승리의 명성과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연예계 인맥이라는 가치에 투자했고, 그 결과 클럽 운영을 명목으로 각종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버닝썬 카르텔’이 탄생하고 또 공고해질 수 있었다. --- p.32
한국군이 동성애자를 “성도착” “변태적 성벽” “성선호장애”와 같은 방식으로 군의 제도와 정책안에 기입한 시점은 정신의학계가 공식적으로 ‘동성애’ 질환 모델을 파기하고 ‘동성애’를 DSM의 정신질환 항목에서 삭제한 1973년 이후였다. 계간의 죄가 종교적?사법적 기반 없이 군형법 안에 ‘불시착’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질환 모델에 기반을 둔 병리화와 배제는 의학적 확신이 의문에 부쳐진 시점에서 도입되었다. --- p.51
여기에서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냉전기에 더욱 강화된, 여성 연예인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한 한국의 정치?경제?언론의 남성 동맹과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기왕의 남성 동맹을 이용해 영세한 수준에 머물렀던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남성 동맹의 한 축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흐름의 역사적 층위들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연이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결국은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었던 ‘고통’을 질 나쁜 개인에게 잘못 걸린, 예외적으로 운 없는 한 신인 배우의 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고통은 오히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어떤 정상성을 드러낸다. --- p.72
‘KTX 여승무원’ 사태는 한국 사회에 노동의 비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업무의 외주화를 불러온 본격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1990년대 초반부터 정부가 주도해온 소위 ‘노동유연화’ 흐름의 결과지만, 그 효과적 확산은 우리 안의 성차별주의를 비정규직 차별과 결부시킴으로써 가능했다. 파업 초기 KTX 사태에 대한 가장 흔한 반응은 ‘손쉽게 정규직이 되려는 이기적인 젊은 여성들’에 대한 질타였다. (…) 당시 철도청이 KTX 개통을 앞두고 대대적인 여승무원 공개 채용을 홍보 수단으로 삼으면서도 지원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고 몇 번이나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 p.80~81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가해자는 살인 혐의에 대한 1차 공판에서 자신의 의견을 묻는 재판부에 “여성들에게 받은 피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그 같은 일을 한 것 같다.”고 답변하며 “내가 유명인사가 된 것 같다.” “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발언에 유명을 달리한 피해자의 자리는 없다. 그는 오직 남성들과 관계를 맺고 이들과 대화할 뿐이다. --- p.104
거의 모든 조사에서 동시대 한국의 성매매 경제 규모는 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로 ‘코리안 바(Korean bar)’가 이미 고유명사가 된 사실이 보여주듯 한국식 룸살롱과 같은 영업 스타일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성매매 업소는 대형화되었고 각 업소 영업 방식이 세분화되고 등급화되면서 성매매 산업의 경제 규모가 팽창했다. 룸살롱에서 15년 동안 일하며 성매매 산업이 팽창한 모습을 지켜본 한 영업실장 역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룸살롱이 다변화된 데 대해 “경기 하락에 대한 자구책의 결과”라고 진술한다. 룸살롱은 더 이상 화이트칼라 남성들만 찾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계층 남성들의 놀이터가 되어야 했고, 이들 모두가 위화감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가격과 서비스가 다양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룸살롱은 업소의 가격 수준, 여성들의 외모 등급, 여성들이 제공하는 성적 서비스의 범주에 따라 세세하게 등급화되었다.--- p.158~159
여성들은 상급, 하급, 동급 업소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업소를 빈번하게 이동하는 것은 그나마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노동환경을 찾고자 하는 여성들의 전략이다. (…) 여성들의 잦은 이동은 브로커, 미용실, 성형외과, 옷가게 등 성산업 주변 상인들에게 언제나 이익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등급화된 성매매 산업에는 여성들의 이동을 끊임없이 권장하는 브로커와 상인이 함께 포진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쉴 새 없이 업소를 이동하며, 이동 중에 여성들은 잠시 해외 업소로 이동하기도 한다. 소위 ‘원정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 p.162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의 캐치프레이즈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이름을 바꾼 새누리당은 당색마저 빨간색으로 바꾼 터였다. ‘빨갱이’가 환기시키는 위험은 이제 ‘여성 대통령’이라는 문구와 함께 새로움과 혁신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결국 2002년 여성 대통령 논쟁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운 이는 페미니스트도 좌파도 아닌 박근혜였던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사용된 박근혜의 이미지는 자신에게 거는 대중의 기대에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에 대한 향수뿐 아니라 ‘여성 정치 지도자’라는 전망도 있다는 것을 알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전략이었기에. --- p.179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해자는 ‘우리’ 민족 외부에 있다고 가정되어 규탄되면서 식민지 피해자로서 ‘우리’는 더욱 결속된다. 물론 가해국 일본을 규탄하고 그들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활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우리’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위안부’ 문제의 핵심에 가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은 전시 일본군에 의해 제도화된 성폭력 사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피해를 경험하고도 말할 수 없던 그 시간 동안의 삶의 경험도 피해를 구성하는 일부다. 그렇다면 현재의 민족주의적 방식의 ‘위안부’ 기억 활동을 통해 ‘우리’가 결속되는 데 정작 누락되어 있는 것들은 ‘위안부’피해자들의 경험일 것이다. --- p.196
우리는 이 책에서 기억을 페미니즘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병치라는 방법론을 활용했다.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버전의 시간여행인데, 처음 기획할 당시에는 이런 병치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를 뒤덮은 젠더 이슈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하는 페미니스트 논의의 역사성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기획이 진전될수록, 과거의 사건을 현재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서랍을 여는 것을 넘어 현재 맥락에서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 p.197~198
여성들은 백색의 튜닉을 걸친 44인의 희랍 여인으로, 운동장을 돌며 춤을 추는 50인의 선녀로 개막식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여성들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고 역사를 초월한 존재로서, 선녀의 자태와 신비로운 미소로만 세계의 화합과 경쟁의 장에 들어섰다. 이처럼 과시와 축복의 무대는 성별화되어 있다. 여성들은 발전의 주체가 아닌, 발전을 염원하고 응원하는 역할로 축제에 등장하는 것이다. --- p.23
당시 윤락여성들이 갱생 시설로 보내진 것은 단순히 빈민들을 추방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 상품화된 성의 범람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월 기생관광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하던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총 20억 원이나 되는 돈을 특별융자 형식으로 지원해주었고, 국제관광공사에서 발행하는 외래 관광객용 지도에도 기생관광 장소인 요정의 위치를 각국 언어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밝혀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질세라 서울시는 룸살롱과 카바레 등 103곳을 ‘모범업소’로 지정해 여러 특혜를 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에게 보이는 미관을 고려해 네덜란드의 ‘홍등가’처럼 커다란 유리창을 갖춘 성매매 업소 ‘유리방’이 본격 등장한 것도 올림픽을 앞두고였다. --- p.20
이처럼 클럽 관계자, 성폭력 가해자, 불법 촬영자, 불법 촬영물 공유자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된 여성들의 육체가 만들어낸 한국 클럽의 스펙터클은 글로벌 투자자, 아시아 재벌, 한국 남성들이 강남의 버닝썬 클럽에서 주류와 테이블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되었다. 나아가 한류 아이돌 사업가는 이렇게 보증된 여성들의 육체를 통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투자 가능성을 확장해나갔다. 환대하는 여성들, ‘접대’라는 미명 하에 성매매에 동원된 여성들, 살아 있는 여자, 죽은 여자의 육체는 한국에서 국가와 남성의 권능을 증명하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발전을 일구는 일에 성차별적 역할이 부여되고, 심지어 성범죄가 권장되었던 역사를 돌아보건대 우리는 발전에 대한 새로운 열망, 상상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 p.35~36
모자보건법 제정 논쟁에 참여한 지식인들 역시 법안의 필요성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라는 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인구를 줄이고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가족계획 사업의 실행은 추상적인 ‘생명 존중’보다 더욱 긴급한 과제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p.119
이 시대에 여성들은 이 법이 통과됨으로써 “권위 있는 의료기관에서 적절한 시기와 방법, 값싼 가격”으로 보다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모자보건법은 수술에 대한 판단 권한을 여성 자신이 아닌 산부인과 의사들에 사실상 전적으로 위임했다. --- p.123~124
화장실이 ‘에티켓’ 생산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에티켓’에는 관심을 가졌을지언정 새로 진입한 이 노동자 집단을 위한 노동환경을 갖추는 데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일터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남자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칸막이 화장실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부서 남자 사원들이 자신의 외모와 스타일을 품평하는 대화를 강제 청취하는 것은 동시대 여사원들의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 p.142
박근혜가 정치인으로서 정치계에 본격 데뷔한 것은 1997년이었다. 그녀는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에 대한 지지 선언 후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1998년 대구 달성군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국 사회가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박정희 시대’를 노스탤지어적으로 소환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환난의 시기’를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로 극복하고자 한 대중 정서가 박정희의 생물학적인 딸 박근혜를 정치인으로 불러낸 것이다. --- p.174
현재를 과거의 어떤 장면과 병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기억과 연루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증거와 사료를 통해 현재의 사건이 과거 사건의 반복일 뿐이라고 취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기억의 병치는 오히려 증거가 제출되지 못한 이면의 정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실천이다. 예컨대 ‘버닝썬 게이트’가 법정에서 다루어질 때 어떤 사안들은 분명히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될 것이다. 최근 버닝썬의 공동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승리의 3년 전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죄인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 하지만 그는 피해자가 사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 그는 자신이 범죄 행위와 연루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다.
--- p.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