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의제를 가진 능동적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페미니즘 세대’라고 명명하고자 한다.(왜 안 되겠는가?) 이 말은 오늘날의 청년세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페미니즘과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 설정 없이는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동수 「페미니즘 세대 선언」」중에서
나는 세대주의가 교묘하게 계산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너무 일상적으로 편재해 있는 상상에 가깝다. 세대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 심지어 나조차도 근본적으로 세대주의라는 문화적 상상의 영향권 밖에 위치하기는 불가능했다.
---「김선기 「청년팔이의 시대」」중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여성성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일절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여성이 저마다의 이유로 꾸밈을 통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실현하던 시대로부터 일상에서 외모가 아무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여성이 출현한 시대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민경 「1020 탈코르셋 세대」」중에서
『20대 남자』가 지적한 “반페미니즘적 신념”은 단순한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넘어 세계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하나의 서사이자 언어 전략으로 존재한다. 현재 점차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와 증오에서처럼 반페미니즘의 언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시민 사회의 규범을 재설정하는 투쟁의 전선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우창 「“20대 남자” 문제」」중에서
삼포 현상은 청년들 내에서도 계급과 젠더의 균열선을 따라 이질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저학력, 저소득, 낮은 가족 배경의 남성들에게, 고학력, 고소득, 높은 가족 배경의 여성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었다. 저학력 남성들이 결혼뿐 아니라 결혼 밖 친밀성 관계조차 만들어 가지 못하고 고학력 여성들이 결혼을 보이콧하고 있는 독특한 젠더 비대칭성이다.
---「김영미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중에서
80허우 세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자 40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한 한한(韓寒)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 앞 세대가 늘 혁명을 위해 일한 탓에, 사람들은 우리 세대가 아무런 이상을 품지 않는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하지만 때로 게임에서 이기고 싶다거나, 스니커즈를 한 켤레 사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모두 이상이다. 이런 이상들에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본인들을 소비 혁명의 주역으로 간주하는 중국의 새로운 젊은 부유층들과는 달리 신세대 농민공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상반된 얘기를 꺼낸다.
“현재의 삶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이상도 없다. 이전에는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남석 「오늘의 중국 청년들」」중에서
인구의 특징으로만 보면 밀레니얼세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과할 정도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밀레니얼세대가 특별하다는 말은 그냥 시장에서 만들어 낸 상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30세 즈음에는 이른바 ‘좀 톡톡 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전 세대들보다 지금의 30세는 인구의 수도 경제력도 약하니 사회적 관심을 좀 상기시키기 위해 ‘특별하다’는 이미지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러나 밀레니얼세대의 특별함은 내재된 특성이 아니라 다른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영태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중에서
한국에서 세대론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회 변동을 이끄는 집단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실재하는 주체이건 지배 집단의 의도로 만들어지는 기획이건, 경험의 공동체이자 기억의 공동체로 세대를 중심에 놓을 때 역사는 새롭게 쓰일 수 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여전히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 중심의 서사는 청년세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주변부에 위치해 왔던 여러 집단적 범주들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거대 서사에서 소외된 다양한 주체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어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다변화하는 일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을 양성하는 시민 교육의 맥락에서도 중요하다.
---「고유경 「세대, 기억의 공동체」」중에서
「벌새」」중에서에서 은희는 더 잘 보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은희의 신체는 「양철북」」중에서(Die Blechtrommel, Volker Schlondorff, 1979)의 오스카의 신체처럼 사회적 트라우마 자체를 형상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양철북」」중에서의 오스카는 13세 아이의 신체에 갇혀 더는 자라지 못했다. 오스카는 병리적 사회를 구체화하고 있기에 2차 세계 대전 전후 파산하는 독일 사회처럼 정신적으로 파산한다. 그러나 은희는 자라야 한다. 「벌새」」중에서는 성장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묘사하는 동시에 은희의 성장을 예고하거나 묘사하고자 한다. 「벌새」」중에서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나라 「「벌새」」중에서와 성장의 딜레마」」중에서
“네가 기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니?”
“충격을 받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해요.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요. 그런데 청소년들은 달라요. 바로 행동에 나서요.”
“바로 그거다.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야 해. 이 친구들이 훨씬 빨리 움직일 거야. 나를 움직인 것도 청소년이었어. 그레타 말이야.”
---「정혜선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