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너무도 친근하고 확실해 보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믿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기독교가 지상 최고의 좋은 소식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전해졌는지 그 중요성을 가볍게 지나쳐 버린다. 이제 복음이라는 단어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어떤 교회에서는 ‘복음 설교’라는 말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 즉 무사히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장해 주는 공식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에 대해 말할 때(그들은 그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그들이 의미했던 것은 이 모든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1장 “좋은 소식?”」중에서
많은 교회에서 좋은 소식은 좋은 충고로 교묘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말한다. “여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아내 혹은 남편이 되는 것을 도와줄 기술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을 위해 당신을 바른 길로 가게 해 줄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이 충고를 받아들이십시오. 이 기도를 따라하고 구원을 받으세요.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1장 “좋은 소식?”」중에서
그런데 기독교는 세상이 다른 곳이 되었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가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예수님께 있다고 주장한다. 1세기 로마 세계의 핵심부에서 일어난 국정 중대사가 아니라, 같은 시기 로마제국 동쪽의 한 변두리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좋은 소식,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추종자들이 그분에 대해 선포한 좋은 소식은 충고가 아니었다(좋은 충고이든 아니든). 그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두 가지 일 사이에 끼어 있는 새로운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2장 “어리석거나 거리끼거나 좋거나”」중에서
세상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안다. 흔히 그렇듯 급박한 순간이 오면 그것은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사용하는 폭력적 힘으로 드러난다. 그렇다. 그것은 탱크와 폭탄의 힘이며, 총과 칼과 채찍과 감옥과 철조망과 불도저의 힘이다.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무기, 집을 파괴하는 기계,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잔인함, 온유와 친절과 지혜가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와 교묘한 통제다. 로마의 집정관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기 바로 몇 분 전에 예수님이 그에게 설명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 장면은 제대로 핵심을 보여 준다. 세상의 제국은 폭력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사랑으로 다스린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3장 “예수 왕에 놀라다”」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많은 비그리스도인도 앞에서 말한 성난 하나님의 모습에 강하게 반발해 왔다.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매력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림은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기 때문에 명쾌하다. 반면 그것이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우리가 알아 왔던 모든 도덕적 가치를 한쪽에 제쳐둔 채 무섭고 폭력적인 하나님의 그림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장 “왜곡되고 상충하는 복음들”」중에서
일단 우리가 본래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과 관련해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소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미래에 대한 좋은 소식 역시 단순히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그 소식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며, 새로워지고 회복된 창조세계 자체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며, 이는 앞서 살짝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 기독교의 이해에서 완전히 가려져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다시 한 번 말한다. 기독교 복음의 궁극적 비전이 우리 앞에 드러내는 목적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5장 “천국을 다시 생각하다”」중에서
좋은 소식이 모든 개인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정말 생일 파티와 같다. 당신과 내가 초대받았으며, 그래서 우리들 자신의 생일 파티도 될 수 있는, 새 창조를 축하하는 생일 파티. 바로 이것이 복음을 설교한다고 할 때 종종 의미하는 바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 그것을 믿은 사람들이, 몇몇 성경의 저자들이 거듭남이라고 불렀던 것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효력을 발생시킨 구원과 변화는 모든 개인의 구원과 변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도전이다.
---「6장 “잘못된 미래, 잘못된 현재”」중에서
옛 이방 신들은 다시 대중의 상상력 안에 스며들어 와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기독교적 색채를 덧입고 있다. 사람들은 다시금 그들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 현세에서 벼락을 내리거나 죽은 뒤에는 지옥에 던져 버릴지도 모르는 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중세 후기에는 모든 이들이 입으로는 당시 주류 종교였던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 고백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창조에 대한 좋은 소식과 만물의 최종 회복에 대한 좋은 소식 사이, 즉 창조주 하나님의 좋은 소식과 심판자 하나님의 좋은 소식 사이에는 하나님에 대한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좋은 소식이 있다. 바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무한하고 풍성하며 아낌없는 관대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좋은 소식의 가장 중심이다.
---「7장 “하나님에 놀라다”」중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떤 문을 통해 들어왔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집에서 충분히 편안히 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쉼과 충전을 위해 이 집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배우고 나누기 위해 들어왔다. 기도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오직 기도가 중심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나라의 일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8장 “좋은 소식을 기도하다”」중에서